강릉 오죽헌
강릉 오죽헌의 역사를 살펴보자
강릉 오죽헌(江陵 烏竹軒)은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에 있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생가이다. 보물 제165호, 정식 보물 명칭은 '강릉 오죽헌(江陵烏竹軒)'이다.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죽헌동에 있는 조선중기의 목조 건물로, 단일 주거 건축으로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오죽헌'이라는 명칭은 뒤뜰에 검은 대나무가 자란 것을 계기로 붙었다. 검은 대나무를 까마귀 오(烏) 자를 써서 오죽(烏竹)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의 친정집으로 이곳에서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오죽헌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며, 신씨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 시대에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조선 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고, 단종 시대에 병조 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했던 최응현의 고택으로 사용되었다. 최응현은 훗날 신사임당의 외할아버지인 이사온(李思溫)에게 자신의 저택을 물려주게 된다. 1975년에 오죽헌 정화 사업으로 율곡의 영정을 모신 문성사를 비롯해 자경문, 율곡기념관 등을 신축하고 강릉시립박물관과 통합되어 1998년에 개관하였다. 오죽헌 입구에서는 ‘세계 최초 모자 화폐인물 탄생지’라는 소개 문구로 장소를 소개하였다. 오죽헌은 본래 신사임당 생전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백년 전인 15세기 중엽에 건축된 것이 상속되어 신사임당에 이르게 된 것이다. 오죽헌을 건축한 인물은 최치운이라는 강릉의 명사이며, 최치운에게서 그의 아들 최응현에게 상속되었고, 최응현에게서 그의 사위인 용인 이씨 이사온에게로 상속되었으며, 이사온에게서 평산 신씨 신명화에게 상속되었다. 이 신명화가 바로 신사임당의 친부이자, 율곡 이이의 외조부이다. 신명화는 사위인 권처균에게 물려주었고, 오죽헌의 택호는 권처균의 호 오죽헌에서 유래된 것이다. 신사임당의 외고조부인 최치운에게서 신사임당에게까지 내려온 고택이 바로 오죽헌인 것이다.
신사임당과 율곡이이 선생님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1504년 12월 5일 ~ 1551년 6월 20일)는 조선 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이다. 조선시대 중기의 성리학자 겸 정치인 율곡 이이, 화가 이매창의 어머니다.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본명은 신인선(申仁善)이라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으며 사임당은 그의 당호(堂號)이다. 조선 중기의 여성 예술가이자 한국의 어머니상인 신사임당과 남편 이원수의 아들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아명은 현룡(見龍), 시호는 문성(文成).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이자, 이론에만 몰두하지 않고 현실 개혁에도 적극적으로 노력한 정치가. 우리나라 오천원권 지폐의 모델이며, 신사임당이 오만원권 지폐의 모델이 되며 모자가 지폐 인물이 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본인은 평생 붕당의 대립 해소에 진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후 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랫동안 유학자의 면모만 부각되어 왔지만 정치가로서도 영향력이 컸다. 생전에 이이의 서얼 차별 완화 등의 개혁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사후 조선에서 거론된 수많은 정책과 개혁론은 이이의 사상과 정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천재 중 하나로 책을 읽을 때 무려 10줄을 1번에 읽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 뭐가 대단한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 시대 책들은 일부 서적을 제외하면 전부 한자로 적혀 있던 시절이다. 가독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 조선 선비라도 1번에 1줄 읽는 것도 어려워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사실 이이가 조선의 대표적인 천재로 인정받는 이유에는 학습 능력이 빼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겨우 23세에 정립해 일관되게 유지했던 이기일원론으로 조선 유학의 사상적 물줄기를 완전히 바꿔놨던 뛰어난 사상 때문이다.
오죽헌과 관련된 여담을 알려드리면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들도 새부리 모양으로 빠져나오는 간결한 형태로 짜은 익공계 양식으로 꾸몄다.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건물이다. 조선 시대 중기의 양반집 모습을 보존한 희귀한 예로서 주심포(柱心包) 계통의 청순하고 소박한 팔작집이다. 평면 구조는 왼쪽으로 향한 2칸이 대청이고 오른쪽 1칸이 온돌방으로 되었으며, 기둥머리에는 창방(昌枋)만이 돌려지고 그 위에 기둥머리를 놓고 초공(初工) 하나로 장설(長舌)과 주심(柱心)도리를 받도록 했고, 기둥 사이에는 화반(華盤)이 한 개 있을 뿐이다. 추녀도 너무 들리지 않고 원만하다. 율곡 이이의 이종사촌인 권처균(權處均)이 자신의 저택 뒤뜰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인 오죽이 자라고 있어서 오죽헌이라는 호를 지었고, 오죽헌이라는 이름 또한 여기서 유래된 이름이다. 오죽헌 바깥쪽에 위치한 외삼문(外三門)인 자경문(自警門)은 율곡 이이가 20세 시절에 지은 자경문(自警文)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가에는 호해정사(湖海精舍)라고 불린 사랑채가 있다. 그 외에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은 별당인 몽룡실(夢龍室)이 있는데, 이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을 때 검은 용이 나타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몽룡실 오른쪽에는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를 낳았던 온돌방이 있고, 왼쪽에는 율곡 이이가 6세 시절까지 공부했던 마루방이 있다. 현재는 신사임당의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1788년에는 정조의 명령에 따라 율곡 이이의 저서인 《격몽요결》과 유품인 벼루를 보관하기 위한 건물인 어제각(御製閣)이 건립되었는데, 이 건물은 1975년에 진행된 오죽헌 정화 사업에 따라 북쪽으로 옮겨졌다. 옛 어제각 터에는 율곡 이이의 영정이 보관된 문성사(文成祠)가 건립되었다. 1977년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5000원 지폐 뒷면의 디자인 소재로 사용되었으며 2006년에 대한민국에서 발행된 5000원 지폐 앞면에도 오죽헌 몽룡실이 그려져 있다. SBS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촬영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