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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전등사의 역사와 문화재 및 은행나무 설화를 살펴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1. 27.

강화도 전등사

전등사의 역사는 이렇습니다.

전등사(傳燈寺)는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정족산에 위치한 사찰이다.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대한민국의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경내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가 있다. 고구려 시기부터 사찰이 세워져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고 중수되었다. 전등사란 이름은 고려 후기 충렬왕 때 붙여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광해군 때 중수된 것이다. 서기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시절 아도화상이라는 승려가 창건하였다. 고려왕조 때 수축하였다가 17세기 초 광해군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고 일제강점기 때 중수된 적이 있다. 고려시대부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로서 중하게 여겼고, 정화궁주가 절에 대장경과 함께 옥으로 만든 법등을 기증하면서 진종사(眞宗寺)라는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바꾸었다. 정화궁주는 본래 충렬왕의 왕비였으나,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에게 밀려 둘째 비로 강등당하여 제국대장공주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던 비운의 여인이다. 1605년과 1614년 큰 화재로 타버렸으나 재건하여 1621년에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찰로 지정되어 왕실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고, 1719년(숙종 45)부터는 주지승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임명하여 우대하였다. 1726년(영조 2) 영조가 직접 전등사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을 쓰고 1749년(영조 25) 중수불사(重修佛事)에는 목재를 시주하여 이때 지금의 대조루(對潮樓)의 모습으로 지었다. 1909년 보관중이던 실록을 서울로 옮겨 사고로서의 지위를 잃었으나, 강화와 개성의 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피해를 보기도 하였는데, 그 당시 정족산성외부의 암자와 건물들을 프랑스군으로부터 방화되어 사라지고, 불상과 법전 등 문화재가 약탈당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곳이 관군과 프랑스군의 교전지였다.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얼핏 낙서처럼 보이는 묵서(墨書)들이 곳곳에 적혀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병인양요 당시 참전했던 조선군 병사들의 이름이다.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앞두고 전쟁에서 이기고 또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를 빌면서 병사들이 대웅전 불단이며 기둥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고. 물론 이후 다들 살아남았다.

전등사에 남아있는 문화재(건물)를 살펴볼께요

강화 전등사 대웅전은 보물 17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사전(보물 179호), 범종(보물 제393호) 등 보물급 유적을 비롯해 국가사적, 인천시 지정 유형문화재 등이 있다. 대웅전 : 전등사 대웅전(傳燈寺大雄殿)은 대한민국의 보물 제178호이다. 전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1615년(광해군 7)에 기공하여 1622년에 준공되었다. 대웅전 앞에는 돌로 만든 누기(漏器)가 남아 있는데 물시계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설 : 대웅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목각상을 벌거벗은 여인인 나부상(裸婦像)이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대웅전 중수를 맡은 도편수가 달아난 여인에 대한 배반감으로 조각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러나, 그 목각상이 원숭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한글대장경 《육도집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전생에 석가모니는 원숭이 500마리를 거느린 원숭이 왕이었는데 무리를 안전하게 지키고자 자신을 희생한 일이 있었다. 그 이야기에서 착안하여 원숭이들의 석가모니에 대한 끝없는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네 마리 원숭이들이 처마를 받들어 지붕을 들고 있게 배치했다는 것이다. 약사전 : 전등사 약사전(傳燈寺藥師殿)은 보물 제179호이다. 전등사에 있는 조선시대 중기의 목조건물. 약사여래좌상을 모신 건물로, 불교 신자들이 병을 고칠 목적으로 이곳에서 불공을 드리곤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다포집 계통에 속하며, 건립 시기는 대략 1621년으로 추정된다.

은행나무에 얽힌 설화는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때는 숭유억불 정책을 펼치던 조선시대, 전등사도 예외없이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관리들과 토호들의 토색질이 심해서 젊은 스님들은 강화성을 쌓는 데 사역을 나가고, 늙은 스님들은 종이를 만들어 바쳐야 했다. 거기에 더해 전등사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 때문에 매년 조정의 은행알셔틀 역할을 해야만 했는데, 그마저도 싹 다 털어 진상으로 바치고 나면 남는 게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스님들은 이것 또한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관가에서 '조정에 진상할 전등사 은행알의 양을 크게 늘리겠다.'며 20가마니를 요구했다. 안 그래도 은행알을 있는 대로 다 털어도 10가마니밖에 안 될 판에 20가마니를 바치라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은행알을 구해서 바칠 수 있을지 막막해서 전등사는 난리가 났다. 조정에 상소를 올려도 씨도 안 먹힐 게 뻔하고, 그렇다고 탁발해서 모자란 양을 보충하자니 '좋은 은행은 승려들이 다 먹고 탁발한 은행들만 진상했다.'고 트집잡힐 게 뻔하니, 이래저래 답이 없는 상황이었다. 고심 끝에 신통력이 있는 백련사의 추송 스님을 불러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다. 추송 스님이 전등사에 도착하자, 전등사 승려들은 은행나무 아래에 단을 쌓아두고 3일기도를 올릴 준비를 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드디어 3일기도가 시작되었는데, 전등사 안은 소문을 듣고 구경을 하러 온 강화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어느샌가 관속 몇 명이 소문을 듣고 나타나서 구경꾼들의 틈에 끼다가, 그 중 한 사람이 설마 공물 셔틀 하기 싫다고 저주 퍼붓는 거 아니냐"고 노스님에게 시비를 걸었다. 스님은 "어허, 어찌 그런 무엄한 말을! 상감께 진상할 은행이 곱절로 열리게 기도하는 것이오." 하고 답했다. 그 관속이 비웃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 ㅋㅋ 그런다고 은행이 더 열릴 것 같은가? 참 웃기는군." 하자마자 갑자기 "악"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감싸쥐고 땅바닥에 나자빠졌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니, 그는 한쪽 눈이 팅팅 뿔어 실명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구경꾼이 더 모여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사흘째, 기도가 거의 끝나자 목탁과 바라 소리가 일제히 멈추고 염불 소리도 멎어 전등사에 적막이 흘렀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추송선사가 은행나무를 향해 "오늘 3일기도를 마치며 이 은행나무 두 그루가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영원히 열매 단 한 알도 맺지 아니하기를 축원하나이다."고 낭랑한 목소리로 기도를 끝맺었다. 이를 듣고 있던 승려들과 구경꾼들은 "어 이거 뭥미? 은행을 곱절로 열리게 하는 거 아니었나?"고 어리둥절해 하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요란한 천둥번개와 함께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며 은행나무에서 은행이 우수수 떨어졌다. 시간이 지나 비바람이 그치고 하늘이 개자 은행나무 쪽을 보니 추송선사와 노승(老僧), 동승(童僧)은 온데간데없이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 날 이후 은행나무 두 그루는 은행을 맺지 않게 되었고 관가의 탄압도 없어졌다. 하긴 진상으로 바칠 은행알이 아예 한 알도 안 열리게 되었으니 그리고 오늘날도 은행을 맺지 않는 은행나무들은 노승나무와 동승나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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