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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의 현장인 경교장 역사와 건축배경과 복원과정에 대해 살펴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1. 21.

경교장

 

슬픈 역사의 현장 경교장을 살펴볼께요

경교장(京橋莊)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29 (평동)에 위치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일본식 주택이다. 일제강점기의 금광업자 최창학의 별장이자 1945년 11월 4일부터 1949년까지 김구의 사저이자 공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청사, 한국독립당 본부였다. 1949년부터 1952년까지는 주한중화민국 대사관저로 활용되었다. 별칭은 죽첨장(竹添莊), 죽첨정(竹添町)이다. 2005년 6월 1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465호로 지정되었다. 경교장은 최창학의 별장이었는데 김구에게 넘겨주고나서 김구가 이곳에서 생활하다 1949년 6월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경교장은 광화문(경복궁)과 서대문 사이에 있던 동양극장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서대문역 인근 종로구 평동 강북삼성병원 부지이다. 금광으로 돈을 번 친일파 최창학 소유의 별장이었던 이 집은 건축면적 396.69m2, 연면적 945.45m2(지하1층, 지상2층)규모로 지은 일본식 건물로, 1938년 완공 당시에는 죽첨장(竹添莊)이라 하였다. 8·15 광복 이후 최창학이 김구의 거처로 제공하였는데, 김구가 죽첨장이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 근처에 있는 경교[京橋;경구교(京口橋)의 약칭]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개명하였다. 김구가 반탁·건국·통일 운동을 주도할 때에는 흔히 서대문 경교장이라고 일컬었으며, 임시정부 성격인 비상국민회의의 국무회의가 열린 청사로 민족진영 인사들의 집결처로 이용되었다. 이후 최창학에게 반환되었고 다시 중화민국 대사관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에는 미국 특수부대가 주둔하는 등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다. 1967년 삼성재단에서 매입, 건물 뒷면에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 본관을 붙여 건축하면서 오랜 기간 병원 현관으로 사용되었다. 당초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었으나 한국 근·현대사에서의 동 건물의 중요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2005년 6월 13일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465호로 승격되었다. 건물 2층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김구 선생의 옛 집무실을 삼성에서 김구 기념실로 운영하기도 했다. 2009년 8월 14일에는 60년 만에 경교장 전체를 복원하기로 하여, 건물 내에 있던 병원 시설들을 모두 옮기고 2011년 3월부터 공사에 들어가 2013년 3월 1일 개관하였다. 2021년 11월부터 12월까지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

경교장을 건축하게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 평안북도의 수많은 금광 중 삼성금광(金鑛)으로 벼락부자가 된 친일 기업인 최창학의 개인 소유 자택이었고, 본래는 '죽첨장(竹添莊)' 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었다. 최창학의 친일(親日) 인명사전에도 오른 인물이다.  당대의 문화주택 붐에 힘입어 야심차게 건설한 죽첨장이었지만, 정작 최창학 본인은 바로 뒤에 있던 한옥에 살았다. 개항 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서구화된 건축양식이나 생활습관들이 도입되었지만 기존의 방식을 바꾸지 못해 온돌집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도 사정은 비슷해서 문화주택 내에 다다미방을 마련한 경우가 어느정도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인 1945년 백범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귀국하게 되면서 분위기를 파악한 최창학이 잽싸게 헌납을 하게 되고 김구와 임정요인들의 거처지로 지정됨에 따라 김구의 개인 사저로 바뀌게 되었다. 이름도 왜색(倭色)으로 아부성이 짙은 죽첨장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경교(京橋)'는 '경구교(京口橋)' 라는 서대문 근처에 있었던 다리의 줄임 명칭이다. 특히 김구가 이승만과 정부수립 문제로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승만에 맞설 민족 진영의 집결 장소로 부상하게 되었고, 이승만의 사저인 이화장과 사실상 쌍벽을 이루었다. 그와 뜻을 같이했던 김규식의 삼청장(三淸莊)과는 상호 간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교장의 복원과정도 알아볼께요

이렇게 오랫동안 병원으로 쓰이다가 1990년대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김구의 복권, 재조명과 근대 건축물 철거 문제 등이 이루어지면서 경교장의 복원에 관한 주장들도 높아졌다. 1996년 2월 병원측이 경교장을 철거 및 이전하고 17층짜리 새 건물을 지을 계획안을 서울시청에 냈다가 여론의 반발이 일어 서울시는 이를 유보시켰다. 사망 47주기를 맞던 동년 6월 26일에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준비위원회가 백범 묘소에서 경교장 복원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김영삼 대통령과 조순 서울시장에게 복원 및 문화재 지정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에게 경교장을 국가로 쾌척하자고 요청서를 냈다. 이에 정부는 삼성 측에 현장보존을 요청하라고 했으나 서울시는 내/외부가 너무 변형이 돼서 문화재 지정이 어렵다고 했고, 삼성 측도 의료발전계획 및 문화재 복원을 동시에 충족하는 쪽으로 갔으면 한다고도 했다. 이에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은 그해 10월부터 서울 등 주요 도시를 돌며 서명운동을 해왔고, 언론에서도 경교장 복원문제 등을 수차례 심층 보도했다. 1997년 3월 17일에는 청원서를 국회에 냈으며 7월에는 국회 문화체육공보위원회가 현장답사 결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고 했으나 청원심사소위의 심사조차 받지 못한 채 계류 상태로 갔다. 1998년에는 경교장 복원 및 국가지정문화재 촉구를 위해 '백범맞이 굿'을 벌이며 백범 피살 49년 만에 암살 현장에서 처음으로 추도식을 열었다. 1999년 6월 25일에 삼성 측이 백범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와 협의하여 경교장을 용산 효창공원으로 옮기려고 했으나 다음 날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이 관련 청원서가 국회에 계류 상태에 있다고 하여 이전불가 성명을 냈다. 2000년 3월에는 15대 국회의 회기가 종료되어 가자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측이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냈고, 이를 넘겨받은 문화재청이 5월 23일에 〈근대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이란 세미나를 열고 서울시로 하여금 지정조사를 하도록 했다. 2001년 4월 6일 서울특별시에서 유형문화재로 지정했고 같은해 8월 15일엔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5.18민중항쟁구속자회, 《월간 말》 등 재야단체들과 함께 문화재 지정 기념식을 열었다. 다른 한편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측은 5월 28일 국가보훈처에 원형 복원을 요청했으나 얼마 안 가 보훈처 측은 그들의 소관이 아니라며 거절했고, 8월 16일 김대중 대통령에게 경교장을 국가지정문화재로 바꾸고 '임정기념관' 용도로 복원하자고 공문을 냈으나 10월에 서울시 측은 복원이 어렵다고 했다. 그해 11월에는 각 시민사회단체들이 '경교장복원범민족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정부와 삼성그룹 등을 상대로 원형복원을 열성적으로 촉구했고, 2003년에 《비운의 역사현장 아! 경교장》이란 책을 내기도 했다. 같은 해엔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이 2001년 본관 신축 당시 직무유기와 문화재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현명관 삼성의료재단 이사장과 이명박 서울시장, 김충용 종로구청장 등을 고발했으나 무혐의 처리됐다.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2005년에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적으로 지정받아 강북삼성병원이 경교장 일부 중 당시 백범 김구가 생전에 사용했던 집무실이자 암살당했던 장소를 복원함에 따라 김구 기념실로 별도 운영했다가, 2009년에 경교장 전체 복원이 결정되었다. 2013년 3월 2일 복원이 완료되어 무료개방 및 관람으로 일반입장을 확정했고, 현재 입장이 가능하다. 다만, 현재까지 소유주는 삼성의료재단이며 서울특별시는 운영만 하고 있다.(《경교장 복원일지》) 2021년 11월부터 12월까지는 보수 공사를 거쳤다. 현재 경교장의 뒷면은 여전히 병원 건물과 붙어있다. 그래서 2023년 기준 경교장 2층에 강북삼성병원은 배면 복원을 즉각 이행하라고 현수막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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