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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진주의 명물 : 진주성

by 부자손선생 2024. 2. 25.

진주성의 촉석루 전경

진주성의 개략적인 연혁과 개요

본래 토성이었던 것을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중광이 왜구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해 석성으로 개축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 중수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로 사용하였다. 1591년(선조 24년) 7월 경상도관찰사 김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外城)을 쌓았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은 3,800명의 군사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쳐 진주성대첩을 이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이 10월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군을 대파하여 임진왜란 3대첩중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이룬 곳이며, 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진주목사 서예원 및 7만여명의 민관군이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곳이다. 이때 전사한 최경회의 후처이던, 논개도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하여 그 의개를 떨쳤다. 진주성내 촉석루 근처에는 한때 경상우병영과 경상도관찰사가 경상북도관찰사와 경상남도관찰사로 나뉘자 경상남도관찰사부의 부청 소재지였다. 1604년(선조 37년) 마산 합포(合浦)에 있던 경상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옮겨진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부터는 진주관찰부가 설치되고 1896년(건양 원년) 8월 경상남도관찰사 감영으로 정식 개정되었다. 이후 1925년까지는 촉석루 앞에 경상남도의 도청이 있었다. 촉석루 누각은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고,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1960년 촉석루 복원을 시작으로 1972년 촉석문을 복원하였고, 1975년에는 공북문 복원 공사를 마치고, 현재의 모습을 모두 갖추게 되었다.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외성의 둘레를 4km로 쌓고, 내성의 둘레는 1.7km에 이른다. 성내(城內)에는 촉석루·창열사·의기사·북장대·서장대·영남포정사·국립진주박물관·진주성임진대첩계사순의단·촉석문·공북문·호국사 등이 소재해 있다. 성곽의 둘레는 1,760m이고 성 안에는 진주 촉석루, 의기사, 영남포정사, 북장대, 서장대, 창열사, 호국사,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 있고, 1984년에 임진왜란 전문 역사박물관으로 국립진주박물관이 개장을 하였다. 진주성(晋州城)은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에 있는 석성으로, 기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과거 삼국시대에 백제의 거열성이었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존재하나 진주 지역 내에서 백제의 진출과 성의 건립을 증명할만한 고고학적 발견은 없었고 거열은 경남 거창의 옛 지명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진주의 옛 지명은 청주이다. 진주성 공식 소개에도 삼국시대로부터 기원했음을 밝힐 뿐이다. 1963년 1월 21일에 사적 제118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성 내의 진주 촉석루는 1604년부터는 경상우병영의 병영이었고, 1895년 5월부터는 경상도관찰사부가 경남관찰사부, 경북관찰사부로 나뉘면서 경상남도관찰사부의 소재지가 되었다. 

1,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한 소개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터지자, 그해 10월 성내에서는 제1차 진주성 전투가 발발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당시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군사와 1천여 명의 의병으로서 3만 여명의 일본군을 섬멸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제1차 진주성 전투라고도 하고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한다. 제1차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왜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중에서도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율의 행주산성대첩과 함께 3대 첩승의 하나로 꼽힌다. 일명 임란 3대첩(壬亂三大捷)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년) 6월 일본군은 전년의 패배를 설욕하려고 10만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진공하였다. 이때 인근에 있던 박진 등의 군사가 지원했지만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함께 순절하는 비운을 겪었다. 성이 함락되자 진주목사 서예원은 살해되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 의병장 김천일 부자, 고종후 등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진주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왜군은 항전에 참가한 2만~3만에 달하던 성민․피란민들도 일거에 학살하였다. 최경회는 다른 장수들과 모여 성을 지켜내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결의하고 촉석루에 올라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하고 미리 준비해 둔 임종시를 읊으며 남강에 투신 자결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전 다른 부녀자들과 함께 성 밖으로 피신한 최경회의 첩 논개는 그해 7월 7일(칠월 칠석) 촉석루에서 승리를 자축하는 연회를 열기 위해 기생을 소집한다는 방을 보고, 하늘이 주신 설욕의 기회라 생각하고 기녀 행세를 하고 축하연에 들었다. 7월 7일 논개부인은 곱게 화장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들어갔는데, 전설에 의하면 논개가 열 가락지를 낀 것은 왜장을 껴안되 풀어지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한다. 연회에 참석하여 게야무라 로쿠스케 등 일본군 장수들이 술에 크게 취하자 춤을추며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바위로 왜장을 유인해 혼신의 힘을 다해 왜장의 허리를 껴안고 남강으로 투신 자결하였다. 이후 논개가 투신한 자리는 의암이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주요시설

진주성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역사의 보고이며, 아름다운 남강과 절벽에 지어진 진주성과의 잘 조화된 자연미를 느낄 수 있는 건축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진주성 내에는 정문인 촉석문과 후문인 공북문, 그리고 망루인 촉석루와 서장대, 북장대를 비롯하여 사찰로는 호국사가 있고, 사당으로는 하공진 장군을 모신 경절사, 충절의 여인 논개를 모신 의기사, 임진왜란 때 전몰한 순국영령들을 모신 창열사가 있으며,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으로 명성이 높은 국립진주박물관과 문익점의 장인이자 베틀을 발명하여 의생활을 혁명을 일으킨 정천익 선생을 모신 청계서원 등 많은 주요 시설물들이 있다. 촉석루는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로 남강가 의암바위 위에 장엄하게 솟아 있는 영남 제일의 누각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에 부사 김충광에 의해 창건되어 8차례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처음에는 장원루라고 부르다가 조선 초기 기록에 촉석루로 명명되게 된다. 촉석루는 본래 전쟁이 일어나면 유사시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 또는 경상우도 군사들을 지휘하는 지휘본부로서 사용하였다. 또한 평상시에는 과거 시험 또는 향시를 치르는 고시장으로도 쓰였다. 임진왜란 중에서는 상시 지휘본부로 사용되었고,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서예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이 재건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59년에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복원하였다. 촉석루의 뒷쪽으로는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고 아래로 의암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의기사는 충절의 여인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촉석루 뒷편으로 담을 이웃하고 있으며, 입구에는 시인묵객들이 바친 충절을 찬양한 시비들이 눈에 보인다. 입구를 들어서면, 최근 2008년 10월 1일 고증을 통해 충남대 윤여환 교수에 의해 제작되어 새롭게 봉안한 표준영정이 보인다. 의기사 간판 왼쪽으로는 일제시대 을사오적 중의 하나인 이지용을 꾸짖었던 산홍의 시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다산 정약용이 쓴 촉석루 중수기가 있다. 쌍충사적비는 1972년 2월 12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임진왜란 의병장 제말의 기념비로 촉석루 뒤편 의기사 옆에 자리하고 있다. 1792년 정조 16년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제말(諸沫) 장군과 그 조카 제홍록(諸弘祿)의 공을 기리기 위해 쌍충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일제 시대에 일본 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훼손되어 비가 방치되어 있다가 1961년에 지금의 의기사 옆 자리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제말 장군은 칠원 제씨의 시조로 경상도 고성 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김해, 웅천, 정암, 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공을 세워 곽재우 장군과 함께 공적이 조정에 장계되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임명되었지만 1592년 선조 25년 성주대첩에서 전사했다. 정조는 그 싸움을 《성주대첩》이라고 표현하였으며, 그 공이 이순신 장군의 노량대첩에 비해 적지 않다는 평을 내렸다. 제말은 정조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그의 조카 제홍록도 숙부를 따라 의병활동을 한 이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활동을 하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를 했으며, 정조는 선무공신에 추증하였고 같이 비를 세웠다. 촉석루 앞에 있는 의암사적비와는 떨어져 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