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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가면 꼭 가봐야할 명소 : 대릉원

by 부자손선생 2024. 2. 15.

대릉원 천마총 입구

 

경주 대릉원의 역사와 개요

경주 분지 한가운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당시에도 수도 서라벌 시가지 가운데에 있는 국가 묘역공원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릉원과 바로 옆에 붙은 쪽샘지구에서 발굴 조사해 보니,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 시설과 건물 터가 대릉원 주변 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가지로 가득찬 대도시 가운데지만 대릉원부터는 건물을 못 짓게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조선시대~일제강점기에는 대릉원 무덤과 무덤 사이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편년을 알기는 힘들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무덤의 주인의 이름을 알 수 있는 지석도 출토되지 않아서 무덤 주인의 이름이 밝혀진 무덤은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이 발견된 금관총이 유일하다. 하지만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 때문에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들이 별 손실 없이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다. 이 유물들을 측정하여 대략 4-6세기에 걸쳐 조성했다고 추정한다. 6세기 이후에는 왕릉이나 기타 무덤들을 대릉원처럼 서라벌의 중심부가 아닌 산이나 도시 외곽 쪽에 만들었기 때문에, 대릉원은 아무리 늦어도 7세기 초반 이후로는 더 확장되지 않았던 듯하다. 경상북도 경주시 계림로 9 (황남동)에 위치한 옛 신라의 왕, 왕비, 귀족층의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 밀집 지역. 사적 제512호로 지정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미추 이사금을 대릉(大陵)에 장사 지냈다.'라는 글귀에서 따 와 대릉원(大陵苑)이라고 지었다. 대릉원이라고 하면 좁게는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는 황남동 고분군 쪽을, 넓게는 바깥쪽의 금관총이나 봉황대와 같은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등을 포함한다. 일단 규모가 큼지막한 데다가 경주시 시가지에 있어 접근하기 좋고, 천마총처럼 신라 왕릉 내부를 관람할 수 있는 고분도 있어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거의 필수로 찾는 곳이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내부 관람이 가능한 천마총만 요금을 받는데, 입장료는 2023년 성인 기준 3천 원. 경주역사유적지구의 5개 지구 중 대릉원 지구가 있다. 단, 여기에는 오릉처럼 대릉원에서 약간 거리가 있는 주변 지역이 좀 더 포함되었다. 원래는 지금의 담장 둘러쳐진 구역의 대릉원은 황남리 고분군(40호)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1년 7월 28일에 문화재청에서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하여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을 통합하여 경주 대릉원 일원으로 사적 제512호로 재지정하였다. 황남대총 등의 왕릉에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 등의 유리 유물이 발굴되었다. 링크, 기사. 그러한 로만글라스, 사산글라스들의 주요 생산지, 대량 출토지를 따지면 신라가 중동과 교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대표적인 고분군

황남동 고분군 :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 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 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30기의 무덤이다. 큰 무덤은 돌무지덧널무덤 적석목곽분이고 주변에는 봉문이 없어진 작은 무덤이 있다. 대릉원 안에는 전 미추왕릉을 비롯하여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다. 천마총은 1973년 4월 6일부터 12월 4일까지 발굴조사됐다.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 사전 작업 차원에서 실시했다. 천마총은 지름 47m, 높이 12.7m로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당시 천마도가 그려진 말안장 드리개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이름하여 내부를 공개하고 있다. 또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은 남북길이 120m, 동서길이 80m, 높이 23m의 거대한 쌍무덤으로 남쪽 무덤에서는 금동관과 남자의 뼈 일부 및 많은 유물이 나왔다. 북쪽 무덤에서도 금관과 부인대라는 글씨가 있는 은팔찌 등 많은 유물이 나왔다. 남쪽 무덤의 주인은 남자, 북쪽 무덤의 주인은 여자로, 부부의 무덤을 붙여 만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오동 고분군 : 이 곳 황오동에는 크고 작은 신라시대 무덤들이 밀집되어 있다. 오랜 세월 관리가 되지 않아 봉분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고분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10여 기에 이른다. 이 무덤들은 인접 지역에서 발굴된 무덤 구조로 미루어 볼 때, 주로 4~5세기경의 왕족 또는 귀족을 묻은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된다. 인완동 고분군 : 이 고분군은 월성(月城)의 북쪽 지대에 분포하는 황오동 고분군(皇吾洞 古墳群)에서 동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경주 중심부 평야지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 가운데는 가장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 13기(基)(경주 고분의 일련 번호 19∼27, 147∼150호)의 봉토분(封土墳)이 확인되었고, 새로 10기의 고분이 더 분포하고 있는 것이 조사되었다. 고분들 가운데 19호분, 20호분, 149호분과 나중에 확인된 고분 가운데 1기(156호분)가 발굴조사되었다. 그리고 1977년에는 19호분과 20호분의 북편에 화물주차장이 건립됨에 따라 그 일대가 발굴조사되어 삼한시대(三韓時代)의 목곽묘(木槨墓), 옹관묘(甕棺墓)를 비롯하여 삼국시대의 수혈식 석곽묘(竪穴式 石槨墓),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등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곳에는 황오동 고분군과 같이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무덤이 축조되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봉토가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들은 대부분 적석목곽분으로 출토유물이나 유구의 크기 등으로 보아 신라 귀족들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대릉원과 관련된 자투리 정보

황남대총의 뒷쪽, 정확하게는 황남대총 동쪽 포인트가 대릉원에서 인기 있는 사진 찍는 장소로 유명해졌다. 원래는 역사 유적 전문 사진작가의 작품으로서 그 구도가 알려졌는데, 이후 신라 고고학과 관련된 연구 저서의 표지에도 같은 앵글에 밤에 찍은 사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그러고 한참 후에 SNS를 통해서 사진찍는 포인트로 유명해져 줄 서면서까지 찍는 포인트가 되었다. 황남대총이 너무 유명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황남대총을 경주 지역에서 가장 큰 고분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대릉원 지구 내에서도 황남대총보다 큰 봉황대가 있고, 외곽 지역에도 서악동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 등 다양한 유적지에 황남대총과 크기가 비슷한 왕릉들이 꽤 있다. 다만 이중에서 현재까지 발굴한 곳이 황남대총 하나뿐이라 다른 곳은 다 듣보잡이 되어서 그렇다. 황남대총도 4공 시절 국가 규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발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돌무지덧널무덤 특성상 컨베이어 벨트까지 동원해서 봉분을 통째로 다 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봄이나 여름에 가면 텔레토비 동산에 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대릉원을 보고 텔레토비 동산을 떠올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천마총의 경우에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더더욱 텔레토비를 연상시켰다. 

 

- 위키백과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