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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석굴암의 창건 이유: 알려진 이유와 음모론

by 부자손선생 2024. 1. 9.

경주 석굴암

경주 석굴암 역사 알아보기

경상북도 경주시 진현동의 토함산 중턱에 있는 신라의 호국사상을 잘 나타내는 암자이다. 석굴암은 남북국시대에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만들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불교 문화재의 걸작이자 국보 제 24호. 현대에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서 토함산 아랫자락의 불국사와 함께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불교 예술의 전성기를 이룬 경덕왕 시기, 재상이던 김대성과 이성룡이 창건해서 774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도 석불사로 언급된다. 석굴암은 불교의 전래 경로였던 인도와 중국[3] 등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한반도는 조각 난이도가 높은 돌인 화강암과 청석류가 많고 기후도 달라 저들 나라만큼 석굴이 많이, 크게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 신라에서는 군위군의 삼존석굴(일명 제2석굴암), 골굴사의 12개 석굴, 양산시의 미타암, 남산 칠불암 등 한국사에서 손꼽히게 석굴사원이 많이 지어졌다. 그 중에서도 석굴암은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곳이다. 고려 건국 이후 귀족세계에서 멀어진 석굴암은 그 존재감이 약해져 일부 기행문에서 간간히 언급된다. 17세기~18세기 정시한의 산중일기, 정선의 교남명승첩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 때까지는 어느 정도 석굴암이 관리되었고, 산중일기를 보면 전주에서 불국사와 석굴을 보러 오는 사람이 언급되므로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참배객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 영조 34년(1758)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말기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이 크게 중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를 거치며 경주도 평범한 지방도시로 위상이 떨어지고[4] 불교도 숭유억불 정책으로 차츰 세가 줄어드는 와중에 불국사 마저 폐사되자 석굴암도 해발고도 565미터 산중턱에 있다는 점까지 겹쳐 차츰 잊혀지고 방치되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전국적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해 깊은 산 속의 치안이 불안해져 스님들이 산 아래로 내려가 비어 있는 절이 많았다고 한다.  1902년 8월 세키노 타다시, 1906년 이마니시 류 등 당대의 일제 유수의 사학자들이 불국사를 보러 와서 사진도 찍고 조사했지만 석굴암은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이 이 뒤로 얼마나 한국 유적지 이곳저곳을 활발하게 조사했는지 보면, 불국사를 가놓고도 석굴암엔 안 갔음은 석굴암의 존재를 몰랐다는 증거로 보아야 자연스럽다.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기록들에 석굴암에 대해 언급되고 있고, 1891년 풍양 조씨 가문에 의해서 석굴암이 중수되었다는 '토함산 석굴중수 상동문' 등, 석굴암이 잊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1891년 수리된 것을 마지막으로 16년간 방치되었고,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을 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해 보고하면서 1907년 일제가 석굴암을 '재발견' 했다. 이때 "본존불의 코가 깨졌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져 파손되었으며, 천장의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그래서 1910년 조선통감부는 처음엔 산간 벽지에 있는 석굴암을 해체해 경성부로 옮길 계획을 세웠지만 막상 해체를 시작해보니 돌들의 무게가 워낙 무거워서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이전을 포기하고, 1913~1915년, 1917년, 1920년~1923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서 전면적으로 수리를 했다.

석굴암 창건 이유는 크게 두가지

전통적으로 알려진 사실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김대성은 재상 김문량의 아들이다.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창건 하였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 사기(三國史記)』에는 김대성이라는 이름이 없다. 김문량의 아들로 김대정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를 김대성과 같은 인물로 본다. 한자음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모론 :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을 추모하기 위해 불국사를 크게 중창하고, 석굴암을 만들라고 재상 김대성에게 지시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아들 혜공왕 때, 완공이 되었다. 하지만 혜공 왕이 시해를 당하고, 후에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혜공왕은 경덕왕의 아들이자 성덕왕의 손자이다. 원성왕은 성덕왕과 경덕왕의 사당까지 허물고,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당을 대신 세웠다. 순수 진골 혈통과 단절을 한 것이다. 원성왕의 입장에서는 경주의 대표적인 사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자신과 혈통이 다른 왕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남아있으면, 왕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 그래서 경덕왕의 재상인 김대성이 만들었다고 소문을 냈다고 한다. 사실, 불국사와 석굴암의 규모를 보면 재상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재상이 왕보다 더 화려한 사찰을 지어 자신의 부모를 추모한다면, 왕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왕조 개창을 위한 사전 작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거리와 각종 루머들

첫 번째는 조성연대 문제다. 삼국유사에는 불국사가 751년에 중건되어 774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시기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신라 불교미술은 중대와 하대의 양식이 서로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는 불국사의 창건 연대를 기록했을 뿐 석굴암을 언제 만들었는지는 적지 않았다. 심지어 불국사도 751년에 창건을 시작하여 김대성이 774년에 사망하고 나라에서 이어 완공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774년 이후 완공을 의미하지 774년에 완공이 되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거기에 불국사석탑에서 발견된 석탑중수기 일명 묵서지편이 판독되었는데 여기에는 불국사의 창건 시작 연대를 742년으로 기록했다. 삼국유사와는 9년이 차이난다. 석굴암을 오랜 시간에 걸쳐 만드느라 내부 조각상들의 양식이 서로 달라졌다. 이 것이 두 번째 문제이다. 본존불을 1양식, 그 주변을 둘러싼 10대제자상을 2양식, 사천왕이나 인왕상, 팔부중상을 3양식으로 명명해보자. 1양식과 3양식의 조형적 미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본존불이 최정점이라면 팔부중은 그에 비해서 세밀함이 덜하고 양감이 부족하다. 세 번째 문제는 본존불의 명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명호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불상의 명호에 따라 주변에 배치된 조각상들의 명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본존불이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바닥을 보이게 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했는데, 항마촉지인은 본래 석가불만 취하는 수인(手印)이다. 그래서 일본인 학자들은 오랫동안 석굴암 본존불상을 석가여래라고 판단했지만, 석가불이 아니라 아미타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왜냐하면 신라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아미타불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본존불 역시 항마촉지인을 했는데도 석가불이 아닌 아미타불이다. 또한 창건자 김대성 관련 설화 또한 아미타불일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김대성 설화에선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지었다고 하는데, 전생의 부모가 극락왕생하길 바랐다면 아미타불을 조성함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항마촉지인을 한 아미타불이 나온 이유는 당시 신라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미륵이 어느 나라에 강림하느냐에 관심을 쏟느라 미륵 신앙이 유행했다. 통일신라 때는 전쟁 때 희생된 전몰자들의 명복을 비는 차원에서 정토 사상에 기반한 아미타 신앙이 유행했다. 당시 제작된 불상은 우견편단(右肩偏袒)에 항마촉지인을 하였다. 하지만 학계에서 석가여래라고 주장함은 본존불 주변에 있는 10대제자상 때문이다. 10대제자는 석가모니의 제자이므로 석가불상에만 함께 배치한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을 아미타불상 주변에 배치한다면 굉장히 이상하다. 또한 본존불 앞 석실 통로에는 십일면관음의 부조가 있는데, 관세음보살은 석가불을 호위하는 보살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학계에서 석가여래를 주장하는 사람은 9, 아미타불을 주장하는 사람은 1 정도로 석가여래라는 것이 중론이다. 루머들: 본존 이마에 박힌 보석(호박?)을 일본인들이 빼돌렸다거나 그 보석에 햇빛이 닿으면 반사돼서 일본까지 간다는 뭔가 초현실적인 것이 많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이 이런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사실 마의태자가 2명이고 1명은 금강산에 나머지 1명은 양평 용문사에 들어가 죽었다. 그것에 그의 시신과 함께 보석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일본군이 전쟁 말 일본 본토로 가져가려 한다는 이야기가 주 내용이다. 돔형 지붕의 뚜껑 돌이 파손되었지만, 일제가 훼손한 것이 아니라 신라시대에 건설하는 과정에서 부서진 것이다. 삼국유사에도 전설에 가깝긴 하지만 기록이 있다. '석불을 조각하고자 하여 큰 돌 하나를 다듬어 감개를 만들다가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대성이 속이 상해 있다가 깜빡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시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는 내용이다. 창건자가 돌 깨뜨렸지만 천신이 붙여주셨으니 그냥 쓰자고 얼렁뚱땅 넘어간 것인데, 실제로 저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오늘날에도 건축자가 집주인 몰래 마음대로 하자보수 했다가는 소송이 걸릴 일인데 당시 신라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김대성의 권력을 생각해보면, 석공들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루머로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이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 방향이며 이는 신라의 호국불교 사상을 뜻한다는 주장이 있다. 방향이 대충 비슷하긴 하나, 정확히는 동지 때 해가 뜨는 방향에 더 가깝다. 반면 '석굴의 방향이 동짓날 일출 지점'이고 '동해의 아침 햇살을 본존불 백호에 맞추려는 거룩한 의도로 석굴이 지어졌다.'는 주장은 논지가 일본 아마테라스 신의 태양 숭배에 가깝다는 비판도 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