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표 궁궐인 경희궁을 소개합니다
경희궁(慶熙宮)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 시대 궁궐로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렀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의 이궁(離宮)으로,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 부지 7만 2천 8백 평에 정전, 동궁, 침전, 별당을 비롯해서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던 경희궁은 경복궁, 창경궁과 함께 조선왕조의 3대궁으로 꼽힐 만큼 큰 궁궐이었으며 본래는 100여 동이 넘는 전각들이 있었다. 그러나 5대궁 가운데 가장 철저히 파괴된 궁으로서 흥선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에 의해 몇 채의 전각들을 제외하곤 전부 훼철됐고, 그나마 남아있던 부지 또한 일제강점기에 축소되어 현재 원 상태로 남아있는 건물은 정문이었던 흥화문과 정전이었던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정자였던 황학정까지 세 채에 불과하다. 그나마 초석과 기단이 남아 있고, 뒤쪽에는 울창한 수림이 잘 보전돼 있어 궁궐의 자취를 잘 간직하고 있는 편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희궁 부지에 경성중학교를 만들었으며, 해방 후에 서울고등학교가 위치하였다. 경희궁터는 사적 제271호로 지정되었고,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구로 이전한 이후 서울시립미술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건물을 허물고 경희궁의 일부를 복원하였다. 서울고등학교의 별칭과 경희대학교의 명칭 등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경희궁의 원래 이름은 경덕궁(慶德宮)이었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친 것이다.
경희궁에 머문 인물들
경덕궁터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정원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뒤 재건된 창덕궁으로 들어가기를 꺼려했고, 인왕산 아래 새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짓다가 정원군의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풍수설을 믿고 왕기를 누르기 위하여 그의 집을 빼앗아 1617년(광해군 6년)~1623년(광해군 15) 사이에 경덕궁을 세웠다. 그러나 1623년 인조 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경덕궁을 쓰지 못하였다. 인조가 즉위한 뒤에 창덕궁이 소실되고,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마저 불타버리자 인목대비를 받들어 이 궁궐로 이어하였다.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을 복원하기 위해 인경궁을 헐은 반면, 경덕궁은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곳이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이 곳에서 숙종이 태어났고, 숭정문에서는 경종, 정조, 헌종이 즉위하였으며, 숙종, 순조가 승하하였다. 경희궁은 경복궁 서쪽에 세워진 까닭으로 서궐(西闕)로 불렸고, 이 밖에도 새문안 대궐, 야주개 대궐, 새문동 대궐 등으로 불렸다. 인조는 재위 후 약 9년동안 경덕궁에 임어했다. 효종과 현종은 잠시 머무르는 용도로만 사용했을 뿐, 적극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숙종은 남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다루며 경덕궁 임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이후 1760년 영조는 원종의 시호인 경덕(慶德)과 동음이라는 까닭으로 궁명을 경희궁으로 개칭한 뒤 19년동안 머물렀는데,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죽을 때 까지 거의 이 곳에서 지냈다. 정조는 숭정전에서 즉위하였지만 자객의 위협을 받고 궁을 옮겼다. 경희궁은 순조 29년(1829년) 10월 화재로 인하여 전각 대부분이 소실된 것을 1831년에 중건하였고, 이후 철종이 약 7개월간 머물렀다. 1844년 헌종의 가례 이후 더이상 활용되지 않았다.
주요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흥화문(興化門) :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에 단층 구조로 다른 궁과는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원래자리에는 흥화문터를 알리고 있는 안내비석이 서 있고 그 바로 뒤 금천교와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거기서 부터 숭정전까지 거리로 경희궁의 규모를 가름할 수 있다. 숭정문(崇政門) :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숭정전(崇政殿) : 경희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1926년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했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자정전(資政殿) : 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태령전(泰寧殿) :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위키백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