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 형태와 역사는 어떻게 되나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고인돌은 농업과 정주 생활이 시작된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규모가 크고 구조도 다양한데, 약 4만여 기가 분포한다. 이는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이상에 해당한다. 특히나 전라남도에서 거의 2만여 기가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비록 근래까지 고인돌 귀한 줄 모르고 석재로 써먹기도 하고, 건물이 들어서면서 많이 없앴기에 유실된 고인돌도 많다.[2]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한반도 전역에서 고인돌이 계속해서 발견되어 해마다 개수가 늘어난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3500년 무렵에 만든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카르나크 고인돌이 있다. 스페인 과달페랄 고인돌은 독일 고고학자가 1926년에 발견했는데 기원전 5천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고인돌들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고대 석조 유적은 아니다. 자그마치 기원전 9600년 무렵에 건설된 튀르키예 지역 괴베클리 테페가 있다. 괴베클리 테페는 T자 모양의 석조 건축이라는 점이 고인돌과 비슷하지만 지배자를 매장한 무덤이 아니라 돌기둥을 세워 축조한 고대 신전이거나 또는 조장을 위한 장례 시설로 추측되는 유적이라서 고인돌로 분류하지는 않는다. 괴베클리 테페는 건설된 시기가 워낙 고대라서 화제가 되지만 가장 무거운 돌기둥은 16톤 정도이다. 중국에도 고인돌이 있는데 한반도만큼 많지는 않지만 특히 중국 동북쪽에서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며, 중국 최대 고인돌은 '중국 최초의 지상축조물'이라는 안내문과 함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즉 중국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 최대 규모의 고인돌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에서 발견된 4~5세기 경 가락국의 것으로 추정되는 350t 규모의 고인돌이다. 그런데 2022년 지석묘 고인돌 유적 복원공사 도중 포크레인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이 복원공사는 김해시가 구산동 지석묘를 국가사적으로 승격하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실행했지만 전문가의 입회도 없이 중장비를 이용해 묘역의 잔존 석재들을 갈아 엎어버리며 고인돌의 핵심부분인 상석 아래 묘역 석재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다만, 발굴 조사는 조기에 제대로 이뤄져 상석 밑의 목관묘 1식과 그 안의 토기 2점은 발굴되어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고인돌의 용도와 제작 방법도 궁금해요
고인돌은 '무덤'보다 '거석 구조물'이란 인상이 더 강하지만 밑에는 실제로 무덤이 있다. 대개 땅을 파서 돌널무덤 형식으로 방을 만들어 사람을 매장하고 위에 굄돌과 고인돌을 쌓는다. 다만 전부 무덤방이 있는 것은 아니며 묘표석, 제단 등 종교적인 용도로 만든 고인돌도 있다. 고인돌은 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의아해지는 조합을 이루지만 추측을 해보자면 아마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림은 간단하지만 영국 호킨스라는 학자에 의하면 예를 들어 70톤 덮개돌 운반에는 1,120명, 50톤 받침돌 운반에 800명, 받침돌 세우기 200명으로 이 경우 하루에만 최소 2,120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KBS 역사스페셜에 의하면 6.8톤 덮개돌 운반에 대략 70명이 필요하고, 즉 40~50톤의 덮개돌을 운반하려면 400~500명이 필요하다. 현존하는 고인돌들의 접접면을 봐도 그 당시 끼인 흙 층을 발견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발견되는 선사시대 거석 유적들도 거의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 137호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은 뚜껑돌만 해도 길이 7.1미터, 폭 5.5미터,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흑운모 편마암으로 추정무게는 80톤이다. 부근리 고인돌을 만들려면 장정이 최소 800명 남짓한 집단이 있어야 한다는 구상이 나온다. 해외 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둥근 통나무 위에 약 1톤 무게 돌을 올려놓고 옮기는 데에는 성인 남자 약 10명이 필요하다. 소수설이기는 하지만, 통나무를 굴리고 끈을 썼다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100톤 이상의 돌을 견딜수 있는 통나무는 없음). 통나무를 깔자면 당연히 그것을 벨 수 있는 도구가 있었어야 하고 끈으로 당겼다면 그 정도의 인장력을 견딜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술들이 있었는지 어떤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 그러나 나무는 돌도끼로도 충분히 자를 수 있고, 실제로 발견되는 저 시기의 대형 움막 유적에는 내부에 큰 지붕을 감당하기 위해 수많은 나무기둥들을 세운 흔적이 있는 터가 발굴되므로 견고한 나무 기둥을 가공하는 기술이 있거니와, 이 시기에는 직물을 짜거나 실을 뽑는데 사용한 가락바퀴와 돗자리나 원시적인 거친 직물을 짜는 데 사용된 추인 고드랫돌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실을 뽑고 돗자리를 짤 기술력이면 굵고 튼튼한 밧줄 정도도 충분히 만들고 남는다. 지리학계의 한 논문에서는 고인돌이 산비탈에 위치한다는 점, 장축의 방향이 대부분 경사방향과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풍화현상에 의해 지표에 노출된 거석들이 솔리플럭션 현상에 의해 자연스럽게 산정부에서 산록부로 미끄러져 내려오고, 이 경우 돌을 옮길 필요 없이 산의 하단을 약간 파내서 굄돌을 괴기만 한다면 손쉽게 고인돌을 만들 수 있어서 한반도 고인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반식 고인돌은 이와 같이 축조했으리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덮개돌 하단의 무덤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점, 평지나 낮은 구릉지대에 조성된 고인돌도 많다는 점 등 문제점이 있는 가설이다.
한반도의 대표적인 고창 고인돌도 알아볼께요
전북 고창군에는 전북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의 60%이상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그 수치는 대략 2,000여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창군 죽림리 일원에는 500여기 이상의 고인돌이 밀집 분포되어 있어 단일구역상으로는 최대 밀집도를 보이고 있다. 고창군의 고인돌에 대해서는 그간 꾸준한 조사가 이루어져 개략적인 분포범위와 분포수가 파악된 바있다. 먼저 2003년에는 1,665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그 이후 2005년 고창군 문화유적분포지도에는 1,327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2009년 지표조사에서는 모두 1,119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이는 지정문화재를 제외한 수치로 지정문화재를 포함할 경우 1,600기 내외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죽림리, 봉덕리, 상갑리 일대에 동서로 약 1,764m 범위에 447기가 분포해 있다. 죽림리 고인돌은 해발 15~65m의 등고선을 따라 일정한 높이에 442기가 자리잡고 있으며, 도산리 지동마을에도 고인돌 5기가 남아 있다. 고창 고인돌 유적은 1990년에 사적 제391호로 지정되었으며 행정구역에 따라 상갑리·봉덕리, 죽림리, 도산리 3개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 내에 모여 있는 상태에 따라 상갑리,봉덕리는 4개 지구, 죽림리는 6개 지구로 구분된다. 고창 고인돌의 특징은 좁은 지역 안에서 440여기가 밀집되어 있다는 점이다. 고인돌의 형식은 탁자식·기반식·개석식과, 탁자식의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이 있으며 채석장 유적도 발견되었다. 무덤방 안에서 부장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