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깊은 고창 선운사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께요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 근처에는 도적이 들끓었는데 검단선사가 도적들을 교화하여 소금 굽는 일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후 감사의 의미로 매년 선운사에 소금을 바쳤다는데, 이 풍습은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후 폐사가 되어 석탑 1기만 남았는데 고려 공민왕 3년(1354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다. 조선 성종 3년(1472년)부터 10여 년 간 극유라는 승려가 성종의 숙부 덕원군에게 후원받아 대대적으로 중장했지만, 선조 30년(1597년)에 정유재란으로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광해군 5년(1613년)에 재건을 시작하여 3년에 걸쳐 대웅전,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등을 건립하였다. 백제 위덕왕 24년(577)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정조 18년(1794) 임우상이 기술한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의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이곳에 와서 선운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법명을 법운자로 한 진흥왕은 중애공주와 도솔왕비의 영생을 위해 진흥굴 윗산에 중애암을, 만월대 아래에 도솔암을 각각 세웠다고 한다. 고려 충숙왕 5년(1318)에 효정선사가 중수하였고 공민왕 3년(1354)에 재중수하였으며 조선 성종 5년(1474)에 행조선사가 중창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6년(1614)에 무장태수 송석조가 원준대사를 통해 1619년까지 5년간에 걸쳐 재건하였다. 선운사는 한때 89암자 24굴 189요를 갖춘 대찰로 억불숭유정책을 내세운 조선 시대에도 성종의 어실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며, 태종 때의 사찰폐쇄령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보존된 대찰이었다. 금동보살좌상·지장보살좌상·선운사 대웅전·참당암 대웅전·도솔암 마애불 등의 보물, 동백나무숲·장사송·송악 등의 천연기념물이 있으며, 석씨원류 경판·영산전목조삼존불상·6층석탑·범종·약사여래불상·만세루 백파율사비·참당암 동종·선운사 사적기 등 보물 7점, 천연기념물 3점, 기타 지방문화재 총 19점의 지정문화재 등이 있다. 선운사(禪雲寺)는 대한민국의 전라북도 고창군에 위치한 명승고찰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문화재로서의 가치는 어떨지 알아볼까요
선운사에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도솔암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대웅전(보물 제290호), 참당암 대웅전(보물 제803호), 도솔암 마애불(보물 제1200호), 소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52호) ,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보물 제2031호) 등의 보물 7점과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호),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 등 천연기념물 3점이 있으며, 추사가 쓴 백파율사비(전북 유형문화재 제122호)를 비롯한 19점의 유형문화재가 있다. 이 가운데 도솔암 내원궁(전북 문화재자료 제125호)은 기암절벽 위에 조성된 우리나라 3대 지장기도처 가운데 하나로 연중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동학혁명 때 배꼽에서 비결을 꺼내갔다는 도솔암 마애불이 바로 발아래 있고, 위로는 검단선사에게 쫓겨 달아나던 용이 뚫었다는 용문굴이 크게 입을 벌리고 있다. 백파율사비는 생전에 추사와 선 논쟁을 벌인 조선후기 화엄학의 대종주 백파긍선 스님의 비다. 백파스님이 입적하자 추사가 애통해 하며 직접 짓고 쓰기를, “옛날에 내가 백파와 더불어 여러 번 왕복서한을 주고받으며 나눴던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이 헛되이 입에 올리는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오직 백파와 나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다. 비록 만 가지 방법으로 입이 쓰도록 설득하려 해도 모두 깨닫지 못하니 어찌 백파를 다시 일으켜 서로 마주보고 한번 웃어볼 수 있을까?”하며 당시 벌였던 선 논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표적인 볼거리로서 선운사 대웅전이 있다. 선운사 대웅전(禪雲寺大雄殿)은 대한민국 보물 제290호다. 선운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3년(광해군 5년) 재건하였다. 전면 5칸, 측면 3칸으로 긴 평면을 이루며, 단청 벽화가 뛰어나다. 단층 맞배지붕으로 전면 5칸에는 모두 빗살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마애여래좌상이 있으며 선운사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으로, 머리 주위를 깊이 파고 머리 부분에서 아래로 내려가면서 점차 두껍게 새기고 있다. 평판적이고 네모진 얼굴은 다소 딱딱하지만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가느다란 눈과 우뚝 솟은 코, 일자로 도드라지게 나타낸 입술 등으로 얼굴 전체에 파격적인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3개의 가느다란 주름이 있기는 하지만 상체와 머리가 거의 맞붙어서, 상체 위에 머리를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상체는 사각형인데 가슴이 넓고 평판적이어서 양감없는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옷주름은 선을 이용해 형식적으로 표현하였고, 평판적인 가슴 아래로는 치마의 띠매듭이 선명하게 가로질러 새겨져 있다. 무릎 위에 나란히 놓은 두 손은 체구에 비해서 유난히 큼직하고 투박하여 사실성이 떨어지는데 이는 월출산에 있는 마애여래좌상과 비슷한 고려 특유의 마애불 양식이다. 층단을 이루어 비교적 높게 되어 있는 대좌는 상대에 옷자락이 늘어져 덮여 있으며, 하대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불상은 고려 초기의 거대한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으며, 이 마애불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중에 마애불의 명치 부위에 있는 감실에 비결이 들어 있어 그것이 꺼내지는 날 조선이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 때문에 동학 농민군이 비결을 탈취해 갔다는 말도 전해진다.
선운사와 연관된 계절별 특성은 어떤게 있을까요
봄에는 동백꽃으로 유명하며 첫구절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가 인상에 남는 송창식이 쓴 동명의 노래가 있다. 1990년에 발매되었고 노래방에는 2009년[4]에 수록되었다. 그리고 초파일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여름에는 배롱나무꽃, 가을에는 단풍으로 유명하다. 단풍의 경우에는 인근의 내장산보다 좋다고 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단풍이 들기 전, 9월 중순에서 말에 피는 꽃무릇의 군락지로도 유명하다. 때만 잘 맞추면 절 주변이 온통 붉다. 이처럼 겨울 빼고는 온통 꽃밭이기에 최영미, 정호승 등의 시인이 시로 쓰기도 하였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