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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 화엄사의 역사와 설화: 중요 문화재 정보

by 부자손선생 2024. 1. 3.

구례 화엄사 사찰

구례 화엄사의 역사와 설화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

창건부터 중창시기 : 구례군이 현재 전라남도이기 때문에 화엄사가 백제와 연관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화엄사는 신라 고승들이 창건하고 중창한 절이다. 오늘날의 구례와 광양, 순천 지역은 6세기까지 가야의 영토였고, 6세기 중반 신라 진흥왕이 가야의 전 지역을 신라에 완전히 병합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에 편입되었다. 지금의 광주대구고속도로 경로를 따라 남원시에 있는 아막성까지 신라의 영역이었고 화엄사는 남원에 인접한 지리산 자락의 길지에 지어졌다. 이 지역을 신라에 편입한 진흥왕은 화엄사를 세움으로써 해당 지역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면서 지배력을 강화하고, 아울러 군사적인 목적으로도 활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신라의 전통적인 정복지역 유화정책과 신라 불교 고유의 중요한 특징인 호국불교사상과 연관되는데, 실제로 화엄사는 화랑의 정신교육 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 교육 용도로도 활용되었다.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신라의 고승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 이 분은 신라에 대승 불교를 도입했으며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승려였다. 절의 이름은 당연하게도 화엄경의 두 글자를 따서 붙었다. 이후 643년(신라 선덕여왕 12년)에는 신라 황룡사 9층 목탑 건설을 건의한 것으로도 잘 알려진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법사가 절을 증축하고 석존사리탑(釋尊舍利塔), 7층탑, 석등롱(石燈籠) 등을 지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77년(신라 문무왕 17년) 당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긴 것을 화엄사에 보관한다. 이 기록은 조선 정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보이는 전라도 구례현의 읍지인 『봉성지(鳳城志)』에 적혀있다. 그리고 의상은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경덕왕 때에 8원(院) 81암자(庵子)로서 '화엄불국 연화장세계'의 면모를 갖추었고,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는 도선대사가 다시 증축했다고 한다. 고려 때에도 꾸준한 중수가 이루어졌는데, 943년(고려 태조 26년)가 도선대사의 유지에 따라 중수를 한 이후, 광종, 문종, 인종, 충숙왕 때에 중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인 만큼 고려시대 전시대에 걸쳐 절이 지속적으로 유지보수,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의 와중인 1597년(조선 선조 30년) 인근 석주관에서 일본군과 대치할 때 승군과 군량을 지원해 준 보복으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고, 살아남은 승려들은 지리산과 주변 동굴에서 은신하다가 다시 모여 이 절의 폐허를 본 뒤 분개하고는 이 '대화엄종주'를 다시 세우기로 맹세하고 절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1630년(조선 인조 8년)에 벽암선사가 중심이 되어 재건을 펼쳐서 대웅전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건물들은 1636년, 각황전은 1703년(기록에 따라서는 1643년)에 완료했다. 이러한 재건을 거치면서 화엄사는 1701년(조선 숙종 27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가람(大伽藍)(큰 절)으로 정했다. 선교양종이란 불교의 일파인 선종과 교종을 가리키는데 선종은 참선을 통한 스스로의 깨달음을 중시하고, 교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6.25 전쟁때 '빨치산들이 지리산의 절에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당시 이를 받은 차일혁 초대 경찰 총경이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 하면서 대신 빨치산이 숨기 힘들도록 문짝만 모두 떼어 태울 것을 건의하여 살아난 이야기가 유명하다. 심지어 당시 차일혁 총경이 담당하던 지역은 전라북도였다. 한 마디로 경계를 넘어서 일을 벌인 것. 이 때문에 차일혁 총경은 감봉 조치를 당했지만 후일 화엄사를 비롯해 지리산의 문화유적을 지킨 공로를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3등급)이 추서되었다. 

특이한 가람배치와 주요 문화재 살펴보기

화엄사가 일반적인 다른 사찰들과 차이점을 든다면, 보통 절이라면 탑이나 대웅전이 가장 큰 건물이기 마련인데, 이 화엄사는 각황전이 압도적으로 크다. 물론 각황전 역시 부처상이 있는 금당이긴 하지만. 아무튼 이러한 크기 차이 때문에 가람의 배치가 지나치게 비대칭적으로 변해 좀 이상해졌다. 게다가 각황전 앞의 석등과 그 아래의 서 오층석탑은 삐뚤게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 앞 아래에 있는 동 오층석탑 역시 정 중앙에 있지를 않고 삐뚤게 배치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 더 이상한 점은, 중문(사천왕문)을 지나 대웅전과 각황전을 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보제루를 여느 절과 달리 밑으로 못 지나가고 동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단한 의도가 숨어있다. 절의 방문자가 보제루를 오른쪽으로 멀리 돌게되면 각황전은 멀어지고 대웅전은 상대적으로 가깝다. 그렇게 되면, 원근감에 의해 각황전과 대웅전의 크기 차이가 많이 줄어든다! 또한 보제루를 돌아 삐뚤게 배치되어 있는 각황전과 대웅전, 탑과 석등 전부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게 되면 그 순간 마치 일직선상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서 오층석탑-석등-각황전이 일렬로 놓이고, 동 오층석탑과 대웅전이 일렬로 놓이게 되는 탁월한 시각적 배치를 보여준다. 중요 문화재 : 문화재로서 특히 중요한 것은 지금도 전하는 부속 건물들로서 이들은 모두 신라 시대에 속하는데 거의가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사는 어느 사찰보다도 풍성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깨달은 황제가 산다는 뜻의 각황전(국보 제67호)이다. 조선 중후기인 숙종 때 지어진 건물이지만 숭유억불의 기조 속에서도 임금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 다음 큰 규모로 지어진 법당이다. 본래 장육전이라는 건물이 소실된 곳에 복원하면서 숙종 임금이 현판을 <각황전>이라 사액해서 각황전으로 부른다. 각황전 앞에는 각황전 규모에 걸맞은 거대한 석등(국보 제12호)이 있다.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높이가 무려 6.4미터, 직경이 2.8미터에 달한다. 각황전 왼쪽 뒤로 돌아가면 탑전이 나온다. 이곳에 세워진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국보 제35호)은 이형탑 가운데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가장 완성도가 높은 탑으로 알려졌다. 사자 네 마리가 기단부를 대신해서 탑 전체를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안에는 연기조사의 출가한 어머니가 새겨져 있고 탑 건너편 석등 아래에는 효심 깊었던 연기조사가 무릎을 꿇은 채 차공양을 올리는 모양을 띠고 있다. 이 밖에도 화엄사에 소장되어 있는 영산회괘불탱도 국보 제301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동오층 석탑(보물 제132호), 서오층 석탑(보물 제133호), 대웅전(보물 제299호),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 제 300호), 화엄석경(보물 제1040호), 서오층 석탑 사리장엄구(보물 제1348호), 대웅전 삼신불탱(보물 제1363호),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보물 제1548호) 등이 있다. 또한, 화엄사 올벚나무(천연기념물 제38호)와 부용영관 선사가 이 나무를 보고 시를 읊었다 해서 일명 부용매로 불리는 화엄사 매화나무인 홍매화(천연기념물 제485호)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찾아가는 길

자가용 : 어느 쪽에서 오느냐에 따라 다르다. 서울 등 수도권이나 북쪽에서 오는 경우는 순천완주고속도로 구례화엄사 나들목에서 19번 국도를 따라서 가면 된다. 부산이나, 순천 쪽에서 오는 경우는 황전 나들목에서 17번 국도를 이용해서 온다. 양 쪽 모두 거리가 약 20분 정도로 비슷하며, 18번 국도의 종점으로 사찰 입구로 들어오는 길의 도로명은 화엄사로인데, 왕복 2차로에다가 마을과 학교가 있기 때문에 안전운행은 필수이다. 하지만 2023년4월 우회도로가 개통되었다. 애초에 우회도로 건설 목적이 화엄사를 편하게 진입하기 위함이다.사찰 바로 앞까지 주차가 가능하긴 하지만, 주차비를 내야 하므로 가급적이면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주차해서 숲길을 걸어보자. 대중교통: 구례공영버스터미널에서 화엄사 입구 정류장까지 가는 농어촌버스를 운행하며 5회는 성삼재까지 운행한다. 버스 정류장에 내린 후 화엄사까지 20분 이상 걸어가야 한다. 철도의 경우 구례구역이 가장 가깝지만 역에서 화엄사까지 바로 가는 버스는 없다. 1일 1회 운행하지만, 새벽 시간에만(02:40)에만 운행하고 이 마저도 구례구역 - 구례, 구례 - 성삼재가 타 노선으로 취급된다. 때문에 철도 대신에 택시를 이용하거나, 구례구역에서 구례 읍내까지 가는 버스를 타서 환승해야 한다. 시외버스는 구례, 곡성 경유 광주행, 구례, 곡성, 남원 경유 전주행, 하동 경유 부산서부행이 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