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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천주교의 대표 성지, 명동성당

by 부자손선생 2024. 4. 12.

명동성당 전경

조선 천주교의 역사

조선인 최초로 북경에서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이승훈(베드로)이 1784년 봄에 귀국하여 서울 명례방(현 명동)에 있는 통역관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신앙모임인 '명례방공동체'를 결성하였다. 이승훈, 정약용(요한) 3형제, 권일신(프란시스 자비에르) 형제 등이 광암 이벽(세례자 요한)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 집회를 가짐으로써 한국 최초의 천주교회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이 신앙 공동체는 이듬해 '명례방 사건'으로 김범우가 유배된후 1787년에 서거하면서[5]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뿌린 씨앗은 밀알이 되어 김범우가 서거한지 1세기(100년)가 흐른 1887년에 김범우의 집이 있던 일대의 대지를 매입 완료한후 명동성당 건립을 위한 첫삽을 뜨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1882년 한미수호 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전교회장 명의로 대지매입 작업을 시작하였다. 매입하고 건축에 따른 재정지원은 파리선교회가 하였다. 현재의 명동성당 자리는 침계 윤정현(梣溪 尹定鉉)의 저택이 있었는데 바깥채만도 60칸이 넘는 넓은 집이어서 처음에는 한옥 그대로 교회로 이용했다. 블랑 주교는 이 곳에다 우선 종현 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 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해 한불 수호 통상 조약(1886년)을 체결한 이듬해인 1887년(고종 24) 5월, 대지를 마저 구입하면서 그 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아 내는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 왕실은 천주교 측에 작업 중지와 토지권의 포기를 요구하지만 천주교 측은 공사를 강행했다. 성당의 건설은 조선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1888년 4월 조선 정부는 금교령을 발표하며 천주교를 탄압했는데 이 원인이 명동성당 건립 때문이었다. 당시 고종은 왕궁보다 더 높은 자리에 훨씬 높은 건물이 올라 가는 것에 분개했다.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가까워 성당 건립으로 영희전의 풍수(風水)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소유권을 억류하여 공사를 지연시켰다. 특히 이 저택과 부지는 평소 청백리로 소문났던 침계 윤정현을 위해 고종이 직접 하사한 집[19]이었기에 고종의 분노는 더 컸다. 
고종은 천주교 측에 당장 건축의 중단을 요구했지만 천주교 측은 고종의 요구를 거절했다. 결국 고종은 금교령을 발표해 천주교 및 개신교의 전도 활동을 막았다. 4월 28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식이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3국 공사에게 기독교 전교를 금하라는 조회문을 통보한 것이다. 명동성당 건설로 인한 조선 정부의 금교령 발표로 천주교 뿐만 아니라 개신교 선교사들까지 선교활동에 발목이 묶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성당 건설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미사강론

보통 미사의 강론은 그 미사의 주례 사제나 공동집전 사제가 한다. 그러나 명동성당의 주일에는 다른 본당에서는 볼 수 없는 강론 전담 사제가 있다. 명동 성당은 사제도 많고 주일 미사가 많으며 여러 활동이 바쁘게 돌아간다. 모든 사제가 각자 강론을 준비하기보다는 강론 전담 사제를 두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기에 그렇게 한다. 주일 미사 강론 전담 사제는 명동 성당 사제들(주임, 수석부주임, 부주임, 보좌)이 돌아가면서 담당한다. 미사 집전 사제와 강론 담당 사제가 다르면 강론 담당 사제가 복음 봉독과 강론만 하고 퇴장한다. 즉 강론 담당 사제가 써 준 강론을 미사 집전 사제가 대신 읽는 게 아니라 강론을 쓴 강론 담당 사제 본인이 직접 강론을 한다. 

21세기 명동성당 개발계획

정확한 명칭은 〈명동성당 특별계획구역 세부개발계획〉이다. 명동성당을 비롯하여 종교, 역사, 문화, 건축적으로 의미 있는 건축물들이 밀집한 이 지역을 체계적으로 재단장해, 명동 관광특구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 계획은 2029년까지 20년간 총 4단계로 진행되게 되어있다. 2015년 1월까지 진행되었었던 1단계 사업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업무공간으로 활용되는 교구청 신관이 지하 4층~지상 10층으로 증축되었고[8], 초기 명동성당의 경사로가 복원되었으며 주차장 등으로 쓰이던 상당 진입부가 광장으로 조성되었고, 대신 교구청 신관 지하에 주차공간이 새로 만들어졌다. 그로 인해 차량으로 인해 혼잡해보이던 명동성당 진입부 부분이 상당히 깔끔하게 바뀌었다. 암튼 공사 전 우려했던 것에 비해 반응은 좋은 편으로[9], 교구 사무 공간이 증축되고 지하 상가가 새로 생겼다. 사실 상가라고는 하나 내부가 광장처럼 넓고, 서점과 카페 위주로 입점하여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그러나 1단계 공사가 진행되면서 역시나 이런저런 문제점이 발생했다. 부지 전체가 아니라 대성전만 문화재라서 대성전보다도 오래된 주교관이 문화재가 아닌 것, 땅 파는데 대성전 안 무너지도록 고려 제대로 했는지 논란, 조선시대 유적 + 근대유적 다 묻혀 있는데 무시하고 부숴버린 등. @ 이에 대해 시공사인 대우건설에서 서울대교구와 협의없이 공사 진행의 편의를 위해 진행하다 생긴 문제라며 사과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2단계 사업단계로 교구청 신관이전으로 여유공간이 생긴 교구청 별관 수선이 이뤄지고 있으며 3단계는 계성여자고등학교의 이전으로 생긴 빈 공간에 교구 업무타운 조성과 대강당 증축 등이 추진된다. 마지막 4단계는 60년대 지어진 가톨릭회관 하부 일부를 수선하고 교육관을 철거하게 된다. 그 후 선교센터를 구축하고 수선한 가톨릭회관 하부 필로티에 쌈지공원이 생길 예정으로 있다. 이에 대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이자 천주교 서울대교구 원로사제인 함세웅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한겨레신문》과 인터뷰에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