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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을 소개하고 건축물 및 주요 볼거리를 살펴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1. 13.

덕수궁 중화전

 

덕수궁을 소개합니다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으로, 아관파천 이후 환궁하여 법궁으로 사용되다가 순종 즉위 후 궁의 이름을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하였다. 현재의 영역 외에 선원전, 홍원, 중명전 영역도 덕수궁의 영역으로 모두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에 다시 중건했으며, 1906년엔 대안문(大安門)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게 됐다. 1907년(순종 1)엔 순종이 즉위 후 궁호가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개명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궁역이 대규모로 축소되고 전각들이 대부분 훼철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덕수(德壽)는 '덕이 높고 오래 산다'라는 뜻이다.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하며 아버지인 고종에게 장수를 빌며 내린 궁호이다. 상왕의 궁에 관례적으로 붙이던 이름이다. 같은 덕수궁은 아니지만, 같은 이름의 다른 덕수궁은 조선 초에도 있었다.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한 뒤 이름을 덕수궁이라 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에도 같은 이름인 덕수궁이라 하였다. 즉 고종과 마찬가지로 생전에 양위한 부왕의 궁에 덕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송나라에도 같은 이름의 궁이 있었다.

주요 건축물을 알려드립니다.

덕수궁의 전체 영역은 현 덕수궁 권역, 선원전 및 홍원 영역, 중명전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이다. 대한문(大漢門) : 대한문은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 이후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동년 4월 25일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36]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며,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2021년부터 현 위치에 일제강점기 시절 훼철된 월대를 복원하는 공사에 들어갔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중화전(中和殿) :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행각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중화문(中化門) :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좌우로 행각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정관헌(靜觀軒) : 정관헌(靜觀軒)은 덕수궁의 서양식 정자이다.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으로 1900년경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건립년도는 알 수 없다. 아관파천 후 1897년에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무렵 몇 채의 서양식 건물을 궁내에 지었는데, 정관헌은 그 당시 건립된 초기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외교사절단을 맞아 연회를 여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명확한 기록과 근거는 없다. 또한 고종이 이곳에서 커피를 즐겼다고 설이 있기는 하나 그에 대한 근거자료나 기록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이곳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할 뿐이다. 석조전 :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정면 54m, 너비 31m의 3층 석조 건물로 지어졌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주요 볼거리도 살펴볼께요

수문장 교대식 : 조선시대, 수문장청 소속 무관의 당직을 순번에 따라 교대하는걸 재현한 행사이다. 서울시에서는 경복궁과 덕수궁, 창덕궁에서 실시하며, 이를 벤치마킹해 전주시 한옥마을 경기전, 순천시 낙안읍성, 진주시 진주성, 안동시 웅부공원 대도호부 수문장 교대의식, 남한산성, 공주 공산성 수문장교대식 등 전국 각지의 도성/관아 유적 관광명소에서도 수문장 교대의식을 시행하고 있다. 화요일을 제외한 매일 11시, 13시에 경복궁 광화문 앞에서 파수의식을 진행한다. 엄연한 교대식은 맞지만 규모가 작으며, 수문장이 적간(摘奸)이라는 절차를 통해 당직 및 교대 수문군을 관리, 점검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대시 취타대 4명과 당직 파수군과 교대 파수군 12명이 나와 교대를 한다. 10분 정도 걸리는 교대식이다.  경복궁과 덕수궁 둘다 수문장 및 수문군과 사진 촬영은 가능하다. 경복궁은 수문군이 광화문 앞을 지킬 때만 사진 촬영이 가능하지만, 덕수궁은 수문장교대식 중간에 포토타임이 따로 마련도 되어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