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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명소 이태원 살펴보기

by 부자손선생 2024. 1. 28.

이태원 경리단길

 

이태원은 언제부터 불리웠을까

이태원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의 역원제에서 유래한다. 역(驛)은 파발이나 관리에게 말을 대여해주는 시설을, 원(院)은 관리와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시설을 의미하는데, 과거 이 장소에 있었던 원의 이름이 이태원이었던 것이다. 이태원의 존재는 고려 공민왕이 고려를 침공한 원나라 홍건적 무리들을 피해 피란하는 기사에서 처음 등장한다. 당시 공민왕은 개경에서 안동으로 몽진할 때 파주 분수리를 거쳐 양주 영서역(현 은평구 대조동)을 지나 사평도로 한강을 도강했는데, 이 때 이태원을 지난다. 조선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았다는 이유로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당시 이태원의 위치를 목멱산(남산) 남쪽으로 기록하고 있고, 《연려실기술》과 《용재총화》에서는 이태원에 고산사(高山寺)라는 절이 있어 그 동쪽에 샘물이 솟아나고 큰 소나무가 골짜기에 가득 심어져 있다고 기록한다. 이러한 정보와 《경조오부도》상의 위치를 근거로 당시 이태원의 위치는 이태원동이 아닌 용산고등학교 부지로 비정된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도 이태원을 목멱산(남산) 남쪽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태원은 천일정 가는 길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일정은 지금 용산구 한남대로 12에 유허비가 있다. 또한 이름을 이태원(異胎院)이라 하며, "임진왜란 이후 왜인(倭人)들을 살게 해 준 곳이다. 그 풍속이 지금도 사납고 독하니 왜인의 종자가 남아 있어서일 듯"하다고 기록해 두었다. 이태원은 고려 시대에도 교통의 중심지였지만,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수도인 한양과 영남지역을 이어주는 영남로(嶺南路)의 출발지로써 그 기능이 더욱 부각된다. 한양에서 영남 지방으로 가기 위한 사신들이 첫 번째로 묵는 숙소가 되었으며, 이후 서빙고/한강나루, 사평진, 양재, 판교, 용인의 용인로를 거쳐 영남로가 이어진다. 이태원이 교통의 요지로 사용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로 교통 복지의 편리함이다. 숭례문을 지나 이태원을 거쳐 서빙고로 가는 길에는 별다른 하천이 없고, 둔지산이 113m로 야트막하기 때문에 길이 험하지 않고, 도둑을 당할 일도 별로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리적 이점이다. 서빙고나루는 사평리와 동작진 사이에 위치하여 사평리를 통해 기존의 영남로인 용인으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동작진을 통해 과천이나 수원으로도 이동하기 편리하다는 것이다. 교통요지로서의 이태원은 막중한 것이어서, 연산군이 의정부에서 왕십리까지의 지역을 모두 금표(禁標)에 넣었을 때에도 이태원만은 특별히 제외하였다. 이처럼 많은 교통량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었다. 특히 일본국, 유구국 등에서 오는 외국 사신들이 이태원을 거쳤기 때문에 색주가와 시장도 같이 형성되었다. 또한 당시 조선 관청에서 직접 관리했던 역(驛)과는 달리 원(院)은 국가가 관리비만 지불하고 나머지는 모두 민간이 운영하였기 때문에,[8]이들을 중심으로 이태원 주변에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여겨지고, 이 위치는 현 이태원주공아파트 위치로 비정된다. 이처럼 교통이 편리하고 마을이 형성되자 남쪽에서 올라온 빈민들이 많이 정착하니, 세종 때에 이들을 구휼하기 위한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하기도 한다. 이후 임오군란때에 여기서 사회 하층민들이 많이 동조하고, 이를 진합하기 위한 부대가 파견되는 등 하급 군인과 빈민들이 조선 말기까지도 많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뀌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등 거란과 여진의 풍습이 이태원의 기록에서 특별히 발견되는 사실로부터 귀화한 외국인들을 고려 말기부터 여기에 정착시켰을 것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이후 임진왜란때 왜군에 의해 겁탈당한 여승의 자식들이 여기에 살았다 하여 이태원(異胎院)이라 불리기도 하고, 왜란 이후 귀화한 일본인들을 여기에 거주시키는 등 외국인의 후손들이 여기에 많이 거주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었다. 이외에 병자호란때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라 불리며 천시당한 부녀자들도 여기에 모여 정착하였다.

한국 최초의 다문화 발상지

이태원은 (프랑스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모여 사는) 서초구 서래마을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다문화 거리로 꼽힌다. 과거 미8군 사령부(일명 용산미군기지)와 인접해 있어서 주한미군들의 유흥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많은 외국인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었는데 덕분에 여러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이태원에 전파했기 때문이다. 외국 대사관이 많은 것도 이유 중 하나. 이태원1동의 인구 대비 외국인 비율은 2010년대 기준 25%를 넘는다. 용산소방서 이태원119안전센터에서 언덕을 올라가면 이슬람 건축물인 모스크인 서울중앙성원[6]이 있어서 무슬림들이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의 무슬림들은 아랍권이나 터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 등 이슬람 국가에서 온 이들이 많다. 여담으로 이 모스크는 북한과 외교 경쟁 중이던 1970년대 당시 중동 국가와 외교를 강화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먼저 제시한 것이었고, 모든 이슬람 국가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되어가서 재건축이 필요한데[7] 때마침 튀르키예 정부에서 모든 비용을 자기들이 다 내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2008년에는 유대교 시나고그가 생겼다. 매주 토요일 10시에 안식일 예배를 드린다. 단, 사전신청은 필수다. 나이지리아, 가나, 코트디부아르 등등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들도 종종 보인다. 보통 각종 보따리상을 하는 경우가 많다. 

관광지로서의 이태원을 소개

서울시 관광특구 1호이다. 1997년 서울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된 이후 명동, 동대문 등이 뒤를 이었다. 외국어에 능통한 관광경찰이 배치된 곳이다. # 프랑스인의 서래마을이나 차이나타운처럼 국적에 따라서 특화된 외국인 공간은 있지만 세계 각지의 다양한 외국 문화가 집합된 곳은 서울에서 이태원만한 곳이 없다. 주말이면 다른 국적,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함께 탄다. 다만, 2000년대까지는 관광지라기보다는 전형적인 외국인이 많은 마을로 클럽 등 놀거리는 제법 있었으나 성소수자가 놀러가는 곳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 다른 지역 내국인들이 선뜻 놀러간다고 말하는 곳은 아니었다. 
심지어 1990년대까지 이태원은 일부 주한미군과 외국인들의 문란한 행동의 여파로 장안동, 청량리와 함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지 말라고 하는 장소이자 젊은 여자가 쉽게 가겠다고 말할 수 없는 장소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용산 미군부대 이전과 연예인이 운영하는 맛집 및 경리단길 등이 언론을 타면서 수요가 폭발, 번화가나 관광지로도 부쩍 인기를 끌게 되었다. 다만, 면적의 한계가 있는 만큼 다른 번화가 대비 메인상권의 규모가 큰 곳은 아니다. 단국대학교의 본캠퍼스가 한남동에 있던 시절 단국대 학생들이 주로 놀러오는 지역이기도 했다. 캠퍼스 서문을 나와서 순천향대병원이 있는 대사관로로 쭉 올라오면 이태원에 쉽게 올 수 있기에 먼 거리는 아니었다. 다만 2007년을 끝으로 단국대가 용인 죽전으로 이사를 가면서 대학가 상권의 이미지는 사라졌다. 2007년 송도영 한양대 문화인류학 교수는 “예전의 이태원이 해외로 나가는 문이었다면, 요즘의 이태원은 해외 경험을 재확인하는 공간”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태원은 여권 없이 세계를 만나는 공간이자, 인종·성·계층의 경계가 뒤섞인 해방구 -한겨레21 해외여행에서 맛본 타국의 음식을 고향에서 맛보는 즐거움을 느끼는 공간이라고 한다. 인생 자체가 여행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투어리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한국인이 늘었으며, 이태원에선 한국인이 주인이 아닌데 그것을 즐기며, 이태원은 그렇게 소비된다고 분석했다.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떠난 이후 이태원 상권이 침체되는 것 아니냐는 말은 꾸준히 돌았지만 관광객이 늘어난 덕인지 오히려 몇 년간은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 정도로 주변 시세가 더 올라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젠트리피케이션 여파가 장기화되며 골목 업소들이 폐업해 공실률이 높아진 와중에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여파에 해당 지역 클럽 집단감염까지 겹쳐 잠정휴업하는 업소들이 즐비해지면서 정말로 상권이 위기를 맞았다. 2020년 이 지역 매출이 전년인 2019년 대비 64.7%나 줄어들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바꿨다… 하지만 2023년 4월부터 서서히 상권이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예전처럼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모여들기 시작하고, 7월 현재는 예전과 별 다른 게 없을 정도로 완전히 회복되었다.

 

- 위키백과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