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을 소개해 볼께요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조선 정조 시기에 지은 수원시의 성곽 건축물과 이를 중심으로 한 계획도시이다. 오늘날에도 수원시의 상징이자 랜드마크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늘날의 수원화성은 수차례의 자연 재해와 한국전쟁 당시 파괴된 것을 부분적으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 일반적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건축물은 건축당시 원래모습 그대로인 건축물이어야 하나, 수원화성은 1970년대에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이러한 규정에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수원화성을 계획하면서 그림과 글로 설계도와 내용을 철저하게 남겨 놓은 《화성성역의궤》 덕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다는 점을 인정받아 이례적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설계도와 작업 진행기록이 온전히 남아있는 덕분에, 현대에 유지보수를 해도 세계유산 자격을 그대로 유지가 가능하다. 한마디로 세계기록유산인 설계도와 작업진행기록의 존재로 온전히 유지보수가 가능한 세계유산이다. 정식 명칭은 수원화성(水原華城)으로, 약칭으로 수원성(水原城), 또는 화성(華城)이라고도 부른다. 화성시의 '화성'도 바로 여기에서 따온 명칭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화성이 화성시에 없고 수원시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수 있지만, 이는 수원시와 화성시의 역사적 행정구역 변천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현재의 화성시(화성군)는 원래 수원군에 속했는데, 1949년 수원군 수원읍이 수원부(수원시)로 분리 승격되면서 수원군의 잔여 지역을 이 화성의 이름을 따 화성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그때도 수원화성은 수원읍에 있었음에도 분리 승격될 수원부 지역과 잔여 수원군의 동질성을 부각하기 위해 이름만 따서 이렇게 된 것이다. 실제로 수원과 화성은 같은 고을로 수원화성 축조 전까지 수원부(수원도호부)의 원래 읍치(邑治, 고을 소재지)는 현재의 화성시 화산동(안녕동) 일대였으나 바로 이 곳에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조성하면서(현륭원, 현재의 융릉) 기존 읍치를 밀어버리고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읍치를 이전한 것이다. 또한 수원부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華山)'은 수원 고을의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이를 본따 이 성의 이름을 '화성(華城)'이라 짓게 된 것이다. 1793년 수원부가 유수부로 승격되면서 수원부사를 '화성유수(留守, 오늘날의 수원시장)'로, 수원도호부(수원부)를 '화성유수부(화성부)'라 불렀다. 정조가 장자의 화인축성(華人祝聖)이라는 고사에서 따서 이름지었다고도 한다. 이 내용은 화성시 홈페이지에 적혀있는 것인데, 화성시에서 수원화성이 시명의 유래라고 명시하지만 않았을 뿐, '수원부 읍치와 현륭원을 위호할 성곽의 터를 둘러보면서'라는 내용이 앞서 나오는 것을 보면 그 성곽이 바로 수원화성임을 알 수 있다.
수원성과 관련된 역사도 알아야 겠죠
수원 화성은 1794년, 조선 왕조의 정조(正祖) 24년에 왕궁을 중앙에 위치시키고 서울을 수도로 지정하면서 건립되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말기까지 여러 왕들에 의해 확장과 보수가 이루어지며 궁궐로 사용되었다. 정조가 화성을 세운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이상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정조는 자신이 꿈꾸는 도시를 만들기 위해 대신들과 의논하며 철저하게 서로 계획하고 실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교한 석축술을 보여주었다. 또한 할아버지인 영조에 의해 죽은 아버지인 장헌세자(사도세자)[9]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지었으며, 정약용에게 궁중 비서인 '기기도설'을 하사하여 거중기를 제작하게 하여 정약용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이때 사용된 거중기에 대해서는, 사용된 거중기가 총 11대여서 작업 능률이 4~5배로 높아졌다는 설과, 거중기가 단 한 대밖에 없었고 대신 당시 조선의 모든 기술을 종합한 도구들을 이용하여 축성 기간과 비용을 상당히 아꼈다는 설, 이 두 가지가 존재한다. 또한, 화성 축조를 통해 수도의 북쪽(평양, 개성), 서쪽(강화), 동쪽(광주)와 더불어 남쪽에 군사권을 마련하여 왕권 강화에 힘쓰고자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개성, 강화, 광주, 수원을 유수부로 둔 것은 바로 이들 지역이 군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했기 때문이다. 즉, 적군이 한양으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수도권 지역의 1차 저지선인 셈이다. 일설에 따르면, 최종적으로는 말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같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려고 했다고 하는데, 병으로 정조가 일찍 사망해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 여하튼 왕릉[10]을 옮기고, 왕의 직속 군대인 장용영의 외영을 이 곳에 두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성 하나 공들여 쌓았다고 볼 수 없는 지역이었다. 평지에 있는 교통의 요지인 수원에 굳이 성을 쌓았다는 점에서는 상인들의 유통을 활발하게 하려는 정조의 노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세간에서 흔히 회자되는 천도설은 말 그대로 썰에 불과하다. 수도인 한양에 비하면 화성은 1/16 수준에 불과하다. 성벽의 길이로 따지면 한양도성의 총 길이가 약 18.6㎞인데 반해 수원 화성은 총 길이가 약 5.5km이다. 또 화성행궁의 규모는 말할 것도 없다. 즉 수원이 수도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화성을 내성으로 삼아 행궁을 확장한 후 별도의 외성을 추가해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정도의 구상이 있었다면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해 어딘가에 사료로서 논의가 남아야 하지만 현재까지 딱히 발견된 근거가 없다. 게다가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수운에 목숨을 걸었던 조선이, 한강이라는 거대한 내륙 수로를 버리고 수원으로 수도를 옮겨서 얻을 수 있는 이익 자체가 지극히 적다. 이 시기에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 일대까지가 해안선이기는 했지만, 마포 광흥창~서소문을 통해 한성으로 접근하는 경로와 야목리 일대에서 수원화성으로 접근하는 경로는 거리가 4배 차이고, 더군다나 조선의 도로사정은 상당이 좋지 않았다. 읍성(邑城)이 행정적 형식에 그쳐, 방어 시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에서 농성해야 했던 조선의 성들을 고려한다면, 수원화성은 이전 읍성의 방어 시 문제점을 상당히 극복한 형태다. 이런 형태는 수원화성이 축조된 지 200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양권에서 보기 힘든 형태이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것이다.
관광관점에서 살펴보면요
성벽을 따라 산책로가 매우 잘 조성되어 있어 걸어서 관람도 가능하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보이는 경치나 소소한 볼거리도 훌륭한 편이다. 특히 한양도성의 구조를 생각하면 여러가지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종로라든가, 종로 옆의 수원천이라든가. 한양도성으로 치면 종로와 청계천이 나란히 가는 모습과 흡사하다. 특히 화서문-장안문-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국궁터)까지 이르는 성벽길은 조명도 꽤 괜찮게 해놓아서, 해진 저녁에 연인과 분위기를 잡고 싶다면 추천하는 코스다. 화홍문 옆의 호수인 용연 옆 언덕 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수원에서 숨겨진 데이트 핫플레이스. 방화수류정에서 보이는 화성 전체의 경관도 좋고, 용연에 조성된 공원에서 올려다보는 방화수류정도 아름답다. 관광 열차를 사용하여 관람도 가능하다. 수원문화재단에서는 팔달문에서 시계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일주하는 소요시간을 3시간 코스로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성벽을 일주하는 경로는 내벽을 따라간다는 전제로 길이 평탄해서 걷기 어렵지 않다. 다만 시계방향으로 도는 경우 팔달문 안내소에서 서남암문까지 가는 경로는 꽤 오랫동안 급경사로 팔달산을 올라야 해서 힘든 편이다. 화성 관람 시 관람료는 2022년 4월 7일자로 무료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1000원의 관람료를 받았으나 개방형 시설로 인한 매표 및 검표의 어려움으로 인해 결국 무료 입장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화성행궁의 입장료는 유지하였다.
- 나무위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