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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깊은 순천 송광사의 연혁과 주요 문화재에 대해 공부해 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4. 1. 1.

순천 송광사

송광사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볼께요

남북국시대 신라말의 승려인 혜린선사(慧璘仙師)가 송광산에 길상사(吉祥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것이 시초이다. 그 뒤 후삼국시대의 혼란기에 폐사가 되었는지 고려 인종 대의 승려 석조대사(釋照大師)가 중창하려는 뜻을 품고 자재와 인력을 모아 공사를 진행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를 이을 사람이 없었는지 당분간 길상사는 거의 폐사화되었다가 50여 년 뒤인 고려 신종대에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禪社)로 이름으로 고치고 중창하여 가르침을 베풀기 시작하면서 발전하였다. 덤으로 이때 송광산은 조계산(曹溪山)으로 개칭되었다 한다. 이후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이자 조계종의 제2조(第二祖)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이 중창한 뒤부터 조선 초기까지 많은 국사를 배출하였는데 이 절에서 배출한 국사는 지눌을 비롯해 16명이나 되며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은 중요한 승보종찰이 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성철 스님 등이 있었던 해인사 위주로 중심이 이동하면서 약간 밀리게 되었다. 송광사라는 이름으로 언제부터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보조국사 지눌이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산에 날렸고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지자 그 뒷등을 솔개가 내려앉은 곳이라 하여 치락대라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근대의 문학가 최남선은 이 전설에 따라 송광을 솔개의 사투리인 '솔갱이'라 하여 송광사는 '솔갱이절'을 한자화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른 유래로는 예로부터 조계산에 소나무가 가득했기 때문에 이곳 사람들이 이 산을 솔메라고 부른 것에서 '송광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산 이름을 따서 사찰 이름도 송광사라 불렀다는 설이 있다. 또한 송광사 북쪽에는 광원암(廣遠庵)이라는 암자가 있는데[3]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삼국시대인 516년(백제 무령왕 14년) 6월 승려 가규(可規)가 창건했다는 내용의 상량기(上樑記)가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암자를 절의 기원으로 볼 시에는 연대가 삼국시대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치르면서 폐사에 이르렀으나 승려 응선과 부휴가 천자암, 보조암, 임경당을 차례로 중건하고 동행랑, 천왕문 등을 세웠었다. 1842년에는 큰 화재가 일어나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 없어져 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 직전에는 항일 의병을 돕는 근거지 역할을 했던 사찰이기에 일제에 의해 사찰 건물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는 승려 설월과 율암이 용화당, 명성각 등을 보수하고 장원문, 사감고를 새로 지었다. 이후 현대에 들어 여수·순천 10.19 사건과 6.25 전쟁으로 사찰의 중심 전각들이 불탔는데, 그 뒤 승려 취봉과 금당이 건물들을 복구하였다. 대웅보전은 1988년에 재건된 것이라고 한다. 2017년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던 18세기 조선시대의 고승 묵암당 최눌(1717∼1790)의 것으로 추정되는 진영이 송광사로 반환되었다. 

유서깊은 사찰인 송광사의 주요 문화재에 대해서 공부해 봐야 겠죠

절의 전체 면적, 전각의 수가 전국에서 손 꼽힐 정도로 크다. 다만 큰 절임에도 불구하고 탑이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풍경과 석탑, 석등이 없기 때문에 송광사에는 3가지가 없다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풍경이 없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 터가 연화부수형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 앉는다는 의미 때문이다. 일종의 3대 요소 클리셰인 셈. 3가지 명물도 있는데,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커다란 나무 밥통, '능견난사' 라고 하는 음식을 담는 그릇들, '쌍향수' 라는 향나무, 이 3가지다. 한국의 3보 사찰로도 꼽히는데, 해인사는 법보(팔만대장경), 송광사는 승보(수계사찰), 통도사는 불보(진신사리) 사찰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범어사, 구례의 화엄사 등과 함께 5대 사찰로 꼽히기도 한다. 뛰어난 승려를 많이 배출한 장소답게 여러 고승들이 나왔다. 송광사의 송광(松廣)이란 이름에서 松(소나무 송)자를 파자하여 十八公으로 풀이, 고승 18명이 나오게 될 절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국사전, 약사전, 영산전을 비롯해 목조삼존불감, 고려고종제서, 대반열반경소, 수선사형지기, 금동요령,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 묘법연화경찬술, 금강반야경소개현초 등 전국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문화재가 있는 절로도 유명하다. 송광사 지장전(地藏殿) 내부 오른편에는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인천(1901-1984) 초대 회장과 아내 이순정(1910-2010) 여사의 위패가 큼지막하게 있다. 송광사에서 1985년에 명부전(冥府殿)을 허물고 그 자리에 지장전을 세웠는데, 여기에 필요한 금액을 박인천이 미리 시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장전 오른쪽 벽을 회장 부부의 위패가 넓게 차지하였다. 한자로 청입법왕궁(請入法王宮) 안심좌도량(安心坐道場)이라는 글귀도 위패 옆 벽에 쓰여 있는데, 이는 관음시식 중에 하는 봉안게(奉安偈)라는 기도문의 한 구절로 '법왕(부처)의 궁전에 초대하여 맞아들였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도량에 앉으소서.'라는 뜻이다. 순천 송광사 목조삼존불감, 혜심고신제서, 순천 송광사 국사전 및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등이 대표적인 문화재 이다. 

찾아가는 길도 알려드려요

자가용 : 호남고속도로 주암 나들목으로 나와서 18번 국도를 따라 오면 송광사 아래에 도착한다. 주암 나들목에서 송광사까지는 약 15분 정도가 걸린다. 전라남도 서남부권에서 송광사에 오려면 남해고속도로 벌교 나들목으로 나와서 15번 국도(조계산로)를 타고 오면 된다. 대중교통 : 순천시 시내버스 111번, 63번과 벌교에서 출발하는 보성교통의 곡천10번 계열이 운행한다. 순천 버스와 벌교 버스 모두 각각 순천역과 순천종합버스터미널, 벌교버스공용터미널 인근 정류장에서 정차한다. 벌교역에서 벌교 버스를 타야 할 경우 벌교세무서 앞 정류장으로 가야 해서 조금 걸어야 한다. 버스를 이용할 경우 순천시내 기준 대략 60여분 정도 소요된다. 순천시내까지 저정도 걸리는 것이라 만약 순천만쪽으로 일정을 잡았다면 2시간 이상 걸릴 각오를 해야한다. 게다가 송광사에서 순천시내 구간에는 관광지라고 할게 딱히 없기 때문에 사실상 들어왔던길 그대로 다시 돌아나와야 해 동선상으로도 손해가 크다. 따라서 송광사를 일정에 넣었다면 아침일찍 일정을 시작해야한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