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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누각에 대해 알아 보면: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by 부자손선생 2024. 1. 17.

밀양 영남루

밀양 영남루에 대해 소개합니다

미리벌의 얼에 게시된 영남루 소개는 다음과 같다.영남루는 동서 5간 남북4간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이다. 동서 좌우에는 다시 각각 3간의 익루인 능파각과 침류각이 달려 있다. 문헌에 따르면 영남루는 옛적에 영남사의 절터인데 고려 공민왕 14년(AD 1365년)에 밀양부사 김주가 개창하여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절을 지었다가 고려 현종 때 절을 없애고 종각이 없던 금벼루만 두었던 것을 고려 예종 때 영남루를 지었으며, 1366년 공민왕 14년에 김주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 뒤에 1460년 조선 세조 6년에 부사 강숙경이 누각의 규모를 키워 중건하였고 신숙주가 누기를 지었다. 1542년 중종 37년에 부사 박세후가 다시 중건하였다. 1582년 선조 15년 병화(兵火)로 대루와 부속당우가 불타버렸는데, 1637년 인조 15년에 부사 심흥이 재건한 것을 부사 이지온이 단청을 하였다. 1842년 헌종 8년에 실화로 소실한 것을 2년 뒤인 1844년에 부사 이인재가 재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조선시대 후반기에 속하는 건물로서는 건축미와 규모면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 부사 이인재가 중건할 때의 상량문은 추남 이장한이 지었으며, 준공한 뒤에 김홍근이 지은 상량문이 현판으로 걸려있다. 밀양 영남루(密陽 嶺南樓)는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 있는 누각으로 구 객사(舊客舍)의 부속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1844년에 다시 지어진 조선시대 후기 건물의 특색을 잘 반영한다. 옛날에 귀한 손님을 맞이하여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진주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한국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삼척 죽서루와 함께 2023년 12월 28일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었다. 

유사한 성격의 진주 촉석루

남강에 접한 벼랑 위에 자리잡은 단층 팔작집의 웅장한 건물로, 진주성의 주장대(主將臺)이다. 1241년 고려 고종 28년 축성 당시에 부사(府使) 김충광(金忠光) 등의 손으로 창건하여, 장원루(壯元樓)라고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촉석루(矗石樓)로 명명되었으며, 용두사(龍頭寺)의 남쪽 돌벼랑에 위치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의 파상적인 공격으로 진주성 동문이 무너지자, 김천일, 최경회, 이종인 등은 이곳에 모여서 결사항전 하였으나, 모두 전사하거나 남강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것을 1618년 조선 광해군 10년에 병사(兵使) 남이흥(南以興)이 재건했다. 1593년 7월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이 촉석루에서 승전연을 벌일 때 논개가 촉석루 앞의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강으로 뛰어들었다고 해서 유명하다. 1747년 영조 23년 1월 26일 경상우병영에서 조정으로 진주 사람이 남강 가에서 주웠다고 하는 도장 한 개가 진상되었다. 이것은 당시로부터 154년 전인 1593년 최경회가 소지하고 있다가 남강에 몸을 던질 때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영조는 이것을 창열사에 두고 제를 올리라고 명하고, 도장갑을 만들고 그 위에 글을 지어 촉석루의 의열을 찬송하였다. 촉석루 앞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왼쪽으로 논개의 의기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의기사가 있다. 1780년 정조 5년 다산 정약용은 19세의 나이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인 장인 홍화보가 임지로 있는 진주에 부인과 함께 들렀다. 장인은 촉석루에서 악공과 가인을 불러 사위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다산 정약용은 팔검무(진주검무)를 추는 가인에게 〈무검편증미인(舞劒篇贈美人)〉이라는 시를 지어 헌사하였고, 〈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 지어 의기사에 걸게 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1791년에 정조 15년에 30살의 나이로 진주목사로 있는 아버지에게 다시 들러서 〈재유촉석루기(再游矗石樓記)〉를 적었다. 촉석루 아래 계단을 통해 의암으로 내려갈 수 있게 작은 통로를 마련해 두었는데 중간 부분에 의암사적비가 있고, 그 아래로 남강이 흐르는 곳에 툭 튀어나온 의암(義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1948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때 또 한번 소실되었으며, 지금 남아있는 것은 한국전쟁 때에 불탄 것을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가 시민의 성금으로 새로 건축한 것이다. 대한민국의 인간 문화재였던 임배근이 공사 총책임을 맡았다. 진주 촉석루(晋州 矗石樓)는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내에 위치해 있는 누각이다. 남강변 절벽 뒤편에 있는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쪽 장대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이기도 했다. 일명 장원루라고도 한다. 1365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다. 그 뒤 한국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60년 진주고적보존회에서 재건하였으며 앞면 5칸·옆면 4칸이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촉석루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유사한 누각 하나더: 부벽루

고려 말의 문신이자 학자인 이색(1329~1396)이 지은 한시 중 오언율시의 《부벽루》가 전해 내려온다. 그는 고려의 멸망과 함께 출사를 하지 않고 은둔하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회고적 정서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그가 지은 부벽루에서도 고구려의 옛 도읍인 평양의 부벽루를 지나면서 왕조의 무상함을 노래하면서, 고려 왕조에 대한 애정과 미련, 아쉬움의 복합적인 감정들을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또한 김시습도 그의 소설집 《금오신화》의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취하여 부벽정에서 놀다)’에서 정치적 격랑 속에서 모든 포부를 버리고 떠나야 했던 청년의 아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외에도 조선 후기의 풍속화가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부벽루연회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부벽루(浮碧樓)는 평양직할시 중구역 금수산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본래 393년에 창건한 영명사의 부속건물로서 그 때는 이름도 영명루라고 불렀는데, 그 후 12세기에 이르러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청류벽 밑을 흐르는 맑고 푸른 대동강물과 녹음이 비단결처럼 출렁이는 릉라도가 신비하리만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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