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종묘(宗廟)는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육교로 연결되어 있다. 설로 궁의 동쪽에 종묘를 짓는다라는 설이 있는데 실제로 경복궁(정궁)의 동쪽에 위치한 것이다.
종묘의 역사도 살펴보겠습니다
태조는 재위 3년(1394년)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그 밖에 따로 공신당 5칸, 신문(神門) 3칸, 동문 3칸,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각 5칸, 남쪽 행랑 9칸, 재궁(齎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년 10월,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여 종묘가 주변 언덕에 파묻혀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한 다음 종묘의 건물 형식을 고쳤다. 본래 종묘 건물은 'ㅡ'자로 길게 생겼는데, 지금은 감실에 신위를 모신 몸채 건물과 그 양큰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ㆍ서 월랑으로 구성되어, 가운데가 긴 ㄷ자형 건물이다. 태종 이래로 이 건축 형식이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되었다. 현재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별묘인데, 세종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러나 세종 원년(1419년)에 정종이 승하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종묘 정전 5칸에는 태조와 태조의 4대 조상을 합쳐 다섯 신위로 모두 차 있어서, 이제 이 다섯 신위에 더해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종묘에는 다섯 신위만 모시도록 예법에 규정되어 있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중국 송나라의 예를 따라 1421년 10월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別廟)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실 것을 결정한다.[5] 이 별묘가 지금의 영녕전이다.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의 영녕전은 종묘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셨다고 하여 조묘(廟)라고도 한다.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칸, 양 옆 익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원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지다가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의 규모로 재건한다.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년(1726년)에 4칸, 헌종 2년(1836년)에 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칸,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 뒤 현종 8년(1667년)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년(1836년)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묘를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는 종묘에 모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 경우 이전 장소로는 당시 쓰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주로 이용하였다.
종묘의 주요 건축물은 어떤게 있을까요?
종묘는 제례를 위한 공간이므로 건축이 화려하지 않고 지극히 단순하고 절제되어 있다. 묘정 월대와 기단 위의 건물은 신로를 표시하는 선과 몇 개의 판위(版位), 그리고 장식이 배제된 건축 구조 등 과감히 생략된 조형과 단순한 구성으로 종묘에 구현해야 할 건축 의도를 철저하게 나타내었고, 단청 또한 극도로 절제되었다. 신로, 월대, 기단, 담 등 필요한 공간만 담은 구성과 구조, 장식과 색채의 간결함은 종묘 건축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종묘를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한국에 여행을 왔고 "이 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고 평가했다. 종묘 일곽의 주된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은 凸자형으로 높낮이가 다르게 되어 있다.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인데, 어로는 제사 때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이 길은 어숙실, 정전, 영녕전으로 이어지는데, 어숙실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난 갈림길에는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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