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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찰 해인사를 파헤쳐 본다

by 부자손선생 2024. 1. 14.

해인사 사찰

해인사의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께요

남북국시대 신라 애장왕 3년(802년) 창건되었다. 소성왕의 어머니 성목태후와 애장왕은 해인사에 2500결이나 시납을 했다. 이렇듯 해인사에 신라 왕실이 적극 후원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착하게 살던 노인이 떠돌이 강아지를 데려다가 정성껏 키웠는데, 사실 그 강아지는 용왕의 딸로 잘못을 저질러서 강아지가 되어 속죄하던 중이었다. 속죄를 마친 용왕의 딸은 용궁으로 돌아가 자신을 보살펴 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용왕에게서 도장을 노인에게 주었다. 그 도장은 원하는 것을 쓰고 도장을 찍으면 적은 것이 실현되는 도장이었다. 노인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도장을 쓰지 않고, 오히려 도장을 사용해 절을 세우는 비용을 댔다고 한다. 그래서 바다 해(海)와 도장 인(印)을 써서 해인사가 되었다고 한다. 943년 이후 기술했다고 추정되는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를 참조한 듯한 다음과 같은 전설은 《거제현우두산현암선사중수기(巨濟縣牛頭山見庵禪寺重修記)》에 기록되어 전한다. 해인사를 창건한 승려 순응과 이정은 옛 대가야 왕족의 후예라고 하므로 그들이 신라 왕실의 지원을 받아 옛 대가야 영역인 가야산 자락에 해인사를 창건한 것은 신라 왕실의 대가야 유민 포용책으로 해석되기도 한다.[3] 지금도 해인사 입구에는 창건 당시에 심었다는 나무가 서 있다. 해인사가 원래 대가야의 시조신인 정견모주를 제사 지내던 정견천왕사 자리에 지어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순응과 이정이 대가야 왕실의 후손이기 때문에 정견천왕사 자리에 창건했다는 것이다. 해인사 묘길상탑기에 따르면 후삼국시대의 혼란 때는 도적들이 해인사를 습격해 56명이 죽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이후에도 계속 중요한 사찰로 기능해서, 고려실록과 조선왕조실록을 수도 이외에 사본을 보험용으로 보관해 두는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해인사에서 머물며 쓴 시가 전해진다. 세월에 따라 화재로 인해 총 7차례 중수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마지막 중수를 마쳤다. 신기하게도 화재 때마다 장경판전은 화마를 피해 갔다. 화재가 하도 많이 일어나다 보니까 화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해마다 단오날이 오면 해인사 남쪽에 있는 매화산 남산제일봉 정상 및 절 경내 다섯 곳에 소금을 단지에 담아 묻는 행사를 한다. 남산제일봉이 화기의 형상이라 여기서 화기가 날아들어 해인사에 불이 자주 나기 때문에 바닷물로 불길을 잡겠다는 의미라고 한다. 6.25 전쟁 때 빨치산들이 기지로 삼기에 좋다는 이유로 미군에 의해 폭격 대상으로 지정되었으나 김영환 장군(1921-1954)을 비롯한 파일럿들이 명령을 거부하고 상부를 설득하여 가까스로 폭격을 피했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해인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따라서 2002년 이후 해인사에서는 김영환 장군을 기리는 추모제를 매년 연다. 천수경의 <발원이귀명례삼보>에서, "나무상주시방불, 나무상주시방법, 나무상주시방승"이라는 말이 나온다. 불교의 3가지 보물인 삼보는 부처님, 부처님의 법, 스님이다. 우리나의 삼보사찰도 각각 삼보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해인사는 바로 법보사찰이다. 불보사찰 :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진짜 부처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시고 있다. 법보사찰 :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는 고려 제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다. 승보사찰 :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는 예로부터 이름 난 스님들이 많이 있었다.   해인사(海印寺)는 대한민국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이 유명하다. 중심 전각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며, 비로자나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 150여 개의 소속사찰을 거느리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2개나 있다. 세계기록유산은 팔만대장경이고, 세계문화유산은 장경판전이다. 사람과의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통일신라의 진성여왕과 각관 위홍, 6.25전쟁의 김영환 대령, 성철스님과 혜암스님, 16대 노무현 대통령과의 일화가 남아있다. 2023년 5월 4일부터 무료입장이 가능해졌다.

해인사의 문화재는 무엇이 있을까요

해인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국보, 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20여 점이나 된다. 세계기록유산이자 국보 제32호인 팔만대장경을 비롯해서, 세계문화유산이자 제52호인 장경판전이 있다. 또한 국보 제206호로 지정된 고려목판까지 국보가 3점이며, 보물이 20여 점에 사적과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민속자료 등이 각 1점씩 있다. 다음은 해인사가 보유한 문화재 목록이다. 세계기록유산(팔만대장경) :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동양 각국의 대장경과 비교할 때 오탈자가 거의 없다. 글꼴이 한 사람이 새긴 듯이 일정해서 자체가 예술품처럼 느껴지는 고려 재조대장경이다. 세계문화유산(장경판전) : 해인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름답기도 하지만 과학적 설계는 지금도 찬탄을 자아낸다. 

해인사와 인연이 있는 인물들

진성여왕과 각간 위홍: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진성여왕은 신라의 마지막 여왕이다. 삼촌인 위홍과 사랑을 나누었고, 위홍이 죽자 해인사에 원당을 만들어 추모했다. 이 원당이 지금의 원당암이다. 쌍둥이 비로자나불: 예전에는 해인사에 법보전과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각각 하나씩 있었다. 학계와 불교계에서는 표현 양식으로 추론하여 조선시대 불상으로 여겨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 2005년 7월에 법보전 비로자나불 안에서 남북국시대(통일신라)의 글씨가 나왔다. 불상 시료를 미국까지 보내 조사한 결과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불상임이 밝혀졌다. 비로자나불 안의 글씨 내용은 "대각간의 등신불과 오른편에 부인의 등신불을 2위 만드노니~"였다. 대각간은 대구화상와 함께 삼대목을 편찬한 각관 위홍이고, 대간각의 부인은 진성여왕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다. 지금은 대비로전에 쌍둥이 비로자나불이 함께 모셔져 있다. 성철스님: 대구 팔공산 파계사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만 수행을 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였다. 조계종에서 종정으로 모실려고 했지만, 81번을 사양했다. 이후, 6대와 7대 종정을 역임하면서 처음 매스컴에 모습을 드러냈다. 절을 3천배 한 사람에게만 잠깐 접견을 허용했을 따름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로 유명하다. 혜암스님
해인총림 방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등을 거쳐 조계종 제10대 종정을 지냈다. 화두수행을 강조했고,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말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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