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청계천 역사를 살펴볼께요
청계천(淸溪川)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내부에 있는 지방하천으로, 한강 수계에 속하며 중랑천의 지류이다. 최장 발원지는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한 ‘백운동 계곡’이며, 남으로 흐르다가 청계광장 부근의 지하에서 삼청동천을 합치며 몸집을 키운다. 이곳에서 방향을 동쪽으로 틀어 서울의 전통적인 도심지를 가로지르다가,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에서 중랑천으로 흘러든다. 발원지에서부터 잰 본류의 길이는 10.92 km, 유역 면적은 50.96 km2이나, 백운동 계곡 언저리를 제외한 상류 2.50 km 구간은 일제강점기 이래 전면 복개되어 타 용도로 전용되는 등 사실상 하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현재는 서울 이곳저곳에서 취수한 물을 중류의 청계광장에서 하루에 40,000 세제곱미터씩 인공적으로 방류하는 형태로 하천을 유지하고 있다. 발원지의 계곡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청계광장에서 중랑천 합수머리까지의 중·하류 8.12 km[3] 구간은 서울시설공단의 관리 하에 공원으로 쓰인다. 조선 시대 : 본래 자연하천이었던 청계천은 조선 태종때부터 한양을 서울로 한 조선시대 내내 개거, 준설 등 치수 사업의 대상이었다. 태종은 1406년부터 자연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았으나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1411년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이듬해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큰 공사를 실시하였다. 청계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의 다리를 돌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세종은 청계천의 지천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종로의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는데,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세종은 1441년에 마전교 서쪽에 수표를 세워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세종 이후로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을 쌓게 한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다. 이때의 준설 과정을 《준천사실》으로 기록하였다.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현대 : 1950년대 중반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의 서울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이었다. 청계천 복개사업은 일제강점기나 1955년에도 일부 이루어졌지만,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는 광교 ~ 청계6가(동대문 야구장 부근) 구간,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 ~ 청계8가(신설동) 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 8가 ~ 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었다. 그리고, 이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게 된다.
창계천의 복원과정도 알아볼께요
청계천 복원 사업 : 1990년대에 들어 청계천의 복개 구조물과 노후한 청계고가도로의 안전 문제가 지속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에 이명박 당시 서울특별시장 후보는 청계천 복원을 공약하였고, 32대 시장으로 당선되었다. 2003년 7월 1일에 청계고가도로의 철거가 시작되었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부터 성동구 신답 철교에 이르는 약 5.84km의 구간을 복원하는 공사는 3867억3900만원을 들여 2005년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복원된 청계천의 통수단면 위쪽을 흐르는 물은 잠실대교 부근의 자양취수장에서 취수한 한강물과 도심의 지하철역 부근의 지하수를 정수·소독 처리하여 조달하며, 통수단면 아래쪽을 흐르는 물은 도심의 오·폐수이다. 청계천 장통교 옆 벽면에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화성을 행차하는 것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를 타일로 옮겨놓은 벽면 예술, 다산교와 영도교 사이에 복원해 놓은 복개 이전에 아낙네들이 빨래를 했던 '청계천 빨래터', 청계천 복원 사업에 맞추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황학교와 비우당교 사이에 만든 타일 벽인 '소망의 벽' 등이 시설물로 설치되었다. 또한 '존치교각'이라는 이름으로 옛 청계천 고가도로의 교각을 3개 남겨 놓았다. 청계천 입구의 청계광장에는 팝아티스트 클래스 올덴버그가 설계하여 KT가 서울시에 기증한 소라탑이라는 작품이 설치되었다. 이후 복원 사업 : 서울특별시는 2050년까지 장기 계획을 세워 청계천을 역사와 전통이 있게 복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18년까지 청계천의 인공 보(湺)를 철거한다. 2030년까지는 수표교 등의 유적을 제자리에 옮겨놓으며, 중·하류 수질을 개선할 예정이다. 백운동천이나 삼청동천의 계곡수 또한 이때까지 유입시키기로 정하였다. 최종적으로 2050년까지는 옥류동천과 남산동천을 청계천으로 잇기로 했다.
청계천 연결하는 다리를 살펴볼께요
모전교: 청계천에서 처음 만날 수 있는 다리로, 무교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광통교: 복원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돌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기존에 남아 있었던 돌을 다리와 석벽에 같이 배치를 하여 재조합하여 만들었다. 1958년 청계천 복개와 함께 도로 밑에 묻혔던 것(광교네거리 지하)을 청계천 복원과 함께 복원하였다. 그리고 사적 제 461호로 지정했으며,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세월교: 광교와 광통교 사이에 있는 하천 내부 보도용 다리이다. 광교: 조선시대 광통교 터에 위치하며, 주황색으로 칠해졌다. 우정국로와 남대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장통교: 도보 전용 다리로, 조선 시대의 장통교를 계승했으나 제대로 복원되지는 않았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관철교였다. 삼일교: 삼일대로를 남북으로 잇기 때문에 삼일교라고 이름 붙였다.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옮겨진 옛 수표교를 옮길 자리에 도보를 위해 임시로 지은 철제 다리이다. 하지만 기존의 수표교를 청계천으로 다시 옮겨오는 데에 문제가 많아 계속 사용된다. 관수교: 관수란 수위를 관찰한다는 의미며, 옛 준천사에서 청계천의 수위를 관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돈화문로와 충무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세운교: 세운상가와 연결된다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배오개다리: 옛날 배나무가 심어져 있어 이름이 유래된 배오개(배고개)가 인근에 있어 그 이름을 땄다. 창경궁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배오개교였다. 새벽다리: 옛 재래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천막의 이미지를 막구조로 적용하여 동대문 재래시장의 역사성과 향수를 연출하였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이른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녔기 때문에 상징적으로 이름을 지었다. 마전교: 부근에 우마를 팔고사는 마전이 조선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붙였다. 동호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창선방교였다.
나래교: 평화시장 앞에 위치한 다리로, 나비의 힘찬 날개짓을 형상화 해서 동대문 의류 상권이 비상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1교였다. 전태일다리(버들다리): 청계천에 자라는 버들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이 다리 근처에서 분신하여 노동권 보장에 헌신한 전태일 열사를 기리기 위하여 2012년 11월 1일부터 명칭을 병용하고 있다. 오간수교 : 조선시대에 있던 오간수문에서 이름이 유래했으며, 율곡로와 장충단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맑은내다리: 인도 전용 다리로, 청계천을 순우리말로 바꿔 청계천을 상징할 수 있는 명칭으로 결정했다. 패션 중심의 상징성을 주기 위해 나비가 날개를 편 모습으로 지어졌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나래2교였다. 다산교: 다산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지봉로와 다산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푸른내다리였다. 영도교: 전통 대청양식을 도입한 아치교이다. 황학교: 황학동에 위치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되었으며, 난계로를 남북으로 잇는다. 비우당교: 조선 세종 때 청백리인 하정 류관의 집인 비우당(庇雨堂)을 이름으로 삼았으며, 하정로와 마장로19길을 남북으로 잇는다. 공사 당시 임시 명칭은 비우교였다. 무학교: 무학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무학로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두물다리: 정릉천이 청계천과 만나는 데서 이름을 지었으며, 다리의 모양도 두 개의 물이 만나는 형상을 이뤘다. 고산자교: 고산자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고산자로에서 이름이 유래했다. 신답철교: 중앙선의 철교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장동철교, 청계천 복개 당시에는 마장철교로도 불렸다. 제2마장교: 마장로를 남북으로 이으며, 서쪽과 동쪽에는 각각 마장역과 신답역이 있다. 사근인도교: 용답역의 2번 출구로, 청계천 건너의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세월교: 청계천이 중랑천과 합류하기 직전 지점에 위치한 성동구 사근동과 용답동을 잇는 자전거와 보도용 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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