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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를 방문하기전 알면 좋을 것들

by 부자손선생 2024. 4. 11.

쌍계사 연등행사

 

쌍계사의 역사에 대해 알아봅시다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의상의 제자인 대비(大悲),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중이던 삼법은 귀국 전 중국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을 모시고 삼신산의 곡설리 갈화처(谷雪里 葛花處)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 이곳저곳을 다녀보았지만 그런 땅은 찾지 못했고 지리산까지 당도하였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했고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2]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정상을 평장(平葬)한 후 옥천사(玉泉寺)라는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설화로 전한다. 그후 840년(신라 문성왕 2년)에 당나라에서 선종의 법맥을 잇고 귀국한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가 퇴락한 옥천사를 오늘날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여 선(禪)을 가르치고 범패를 보급하였다. 나중에 헌강왕 때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가 있어[3] 혼동을 일으켰으므로, 문전에 흐르는 쌍계라는 시냇물에 연유하여 쌍계라는 호를 내려 주고 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 그 후 두 차례나 화재로 절이 불탔으나 1632년(인조 10년)에 벽암 각성(碧巖 覺性)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복구, 중수되었다. 차와도 인연이 깊은 절인데,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簾)이 828년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귀국한 후 지리산에 심었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배지(茶始培地)로서, 쌍계사 계곡 아래에 위치해있다. 그후 진감선사가 재배 면적을 늘리고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진감선사와 초의선사의 다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매년 법회를 열고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길 59 (운수리)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이다. 인근의 섬진강과 화개장터에서 이 쌍계사까지의 길에 피어있는 벚꽃들이 매우 유명하다. 그래서 벚꽃이 피는 봄철에는 이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쌍계사의 주요 문화재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지리산 쌍계사 일원은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1호 지리산 쌍계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지리산 쌍계사 일원으로 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는 국보 제47호이다.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덕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친 뒤 정강왕 2년(887년)에 건립한 것으로 고운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썼으며 승, 빈영이 새겼다. 하동 쌍계사 승탑(河東 雙磎寺 僧塔)은 보물 제380호로, 통일신라시대의 부도이다. 쌍계사 경내에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의 화강암으로 만든 부도로서, 높이는 2.05m이다.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진 기단 위에 탑신·옥개석·상륜이 차례로 얹혀 있는 8각원당형의 승탑이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무겁고 조각 수법이 거친 편이다. 쌍계사 대웅전(雙磎寺大雄殿)은 보물 제500호로, 조선 후기의 목조건물이다. 쌍계사 경내에 있는 건물로 크기와 형식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며, 전체적으로 중앙에 비해 좌우 퇴간(退間)의 너비가 좁고, 기둥 사이의 넓이에 비해 기둥이 높아 산곡간(山谷間)의 형태를 보여준다.  동산문화재 외에도 쌍계사 자체도 명승으로 지정 되었다. 쌍계사와 주변 일대는 본래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예로부터 명승지로 이름을 날려 오던 것이 다양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1974년 12월 28일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고, 자연 경관의 아름다움과 역사적 가치 등을 인정 받아 2022년 11월 11일에 근처의 불일폭포까지 함께 포함하여 '지리산 쌍계사와 불일폭포 일원'이란 명칭으로 대한민국의 명승으로 지정됐다. 한편, 문화재처럼 생겼는데 아닌 것도 있다. 천왕문을 지나 올라오면 팔영루 앞에 월정사의 9층석탑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9층석탑이 하나 있는데 1990년에 만든 것이다. 이 탑에는 쌍계사 방장을 지낸 고산(杲山)이 인도, 스리랑카에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3과(顆), 쌍계사의 암자 중 하나인 국사암에서 진신사리 2과, 그리고 불상 1위를 함께 봉안했다. 그리고 대웅전 뒤에는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금강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2007년에 만든 것이다. 이 금강계단은 농심그룹 신춘호 일가가 시주하였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의 지리산 산자락에 있는 쌍계사의 대웅전 앞 계단 아래에 위치한 흑대리석제 비신과 화강암제 귀부[2] 및 머릿돌로 구성된 비석으로, 통일신라 정강왕2년인 887년 7월에 세워졌다.[3]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쌍계사는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의상의 제자인 대비(大悲), 삼법(三法)이 창건한 사찰이며, 840년(신라 문성왕 2년)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진감선사 혜소((眞鑑禪師 慧昭, 774~850)가 쇠락한 절을 크게 일으켰다. 850년 진감선사가 입적하였고, 입적 후 37년이 지난 887년에 왕명을 받은 최치원이 글을 쓴 본 비석이 세워진 것이다. 본 진감선사탑비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 글을 쓴 4개의 비문[4] 중 하나로, 비문의 초반부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음을 적었고, 중반부에 진감선사의 생애와 업적을 적었으며, 후반부에는 쌍계사의 명칭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탑비의 건립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道不遠人, 人無異國)" 라는, 비석의 내용을 시작하는 문구가 잘 알려져 있다.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는 1962년 국보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전남 영암군 쌍계사지 터

통일신라 문성왕 16년, 854년에 창건되었으며, 용의 도움으로 쉽게 절을 중창할 수 있었다고 하여 덕룡사(德龍寺)라고도 불렀다. 그러다 조선 세조 9년인 1463년에 다시 절을 크게 중창하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세조가 잠을 자던 중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묘법연화경 다섯 글자를 보여 주면서 "덕룡사가 있는 곳은 나라의 혈맥이니 이 책을 만들어 덕룡사에 비치한다면 책이 있는 동안은 국가의 사직과 백성들이 평안해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잠에서 깨자마자 급히 신하들을 불러 법화경언해를 만들게 하고 전국에 책을 배포한 후, 절을 크게 중창하고 법화경언해 1권을 쌍계사에 직접 봉안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호연대사의 비 등 사찰의 많은 부분을 일본으로 반출하였고, 6.25 전쟁 직후 그나마 남아있던 삼층석탑 등도 모두 팔려 한조각씩 잘라 들고 갔다. 지금은 폐사지가 되었고 전남 민속문화재 제17호인 쌍계사지장승와 몇몇 지석만이 남아 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