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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2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최초의 사액서원 1542년,[1]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에 사묘를 세워 안향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후일 조선건국의 주도계층인 신진사대부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 다음 해에는 유생들을 교육시킬 학사를 건립하여 소수서원의 전신이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었다. 서원의 명칭인 백운동은 주자가 세운 여산의 백록동서원을 본따 지은것으로 알려져있다. 백운동서원은 부지는 원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자리한 곳이었다. 숙수사의 법통이 어떻게 끊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안향이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향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 2024. 2. 16.
영주 부석사 '한국의 산지승원'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부석사의 역사적 배경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華嚴宗) 사찰이었다. 부석사의 이름을 직역하면 '땅에서 뜬 돌'이란 뜻인데, 이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그를 사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의상은 승려라서 끝내 선묘의 애정을 거절했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 뱃길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가 큰 바윗돌이 되어서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인데, 지금도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된다 카더라. 그래서 절 이름.. 2024.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