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사액서원
1542년,[1]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에 사묘를 세워 안향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후일 조선건국의 주도계층인 신진사대부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 다음 해에는 유생들을 교육시킬 학사를 건립하여 소수서원의 전신이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었다. 서원의 명칭인 백운동은 주자가 세운 여산의 백록동서원을 본따 지은것으로 알려져있다. 백운동서원은 부지는 원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자리한 곳이었다. 숙수사의 법통이 어떻게 끊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안향이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향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수학했다고 알려져있어 적어도 고려말까지는 존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원 내에는 아직도 옛 숙수사의 흔적이나 석조물이 남아있고 통일신라 양식의 청동불상 25구가 출토되기도 했다. 본래 명칭은 백운동서원이었으나 1550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 중 조정에 건의하여 명종이 친필로 사액을 내리면서 현재의 명칭이 되었다. 소수라는 명칭은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사액이란 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은 편액을 하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액서원이 되면 왕의 친필 현판뿐 아니라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적, 노비, 토지는 물론이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이 따라와서 비사액서원과는 격을 달리했다. 때문에 소수서원 이후 세워진 전국의 서원들은 경쟁적으로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런데 뛰어난 유학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초기 서원들과 달리 나중에 생겨난 서원들은 이러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사림파의 세력 형성, 확장의 목적이 주가 되었고 이로 인해 서원의 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나 나중에 서원철폐론이 등장할 무렵에는 무려 1,00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정치를 잘했던 숙종은 사액을 남발하면서 130개가 넘는 사액서원을 만들기도 했다. 이렇게 서원이 난립하다 보니 조정에서는 아무나 함부로 제향하지 못하게 하였고 특히 한 사람이 여러 곳에서 제향되지 못하게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자신의 연고지에 서원을 세웠고 송시열 같은 경우에는 전국에 수십 개의 서원이 존재하기도 했다. 또한 한 서원에서 여러 사람을 제향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으며 본래의 대상인 학문적으로 뛰어나 존경받을 만한 유학자가 아니라도 온갖 이유를 만들어붙여 그 사람을 위한 서원을 세우기도 했다. 서원의 폐단이 지속되자 결국 1741년 영조는 1714년(숙종 40년) 이후 허가 없이 세워진 모든 서원을 철거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은 계속 이어져 1871년에는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원철폐령이 내려지게 된다. 소수서원은 가치를 인정받은 주요 47개 서원에 포함되었고 이황의 제자들을 포함하여 4천여 명의 유생을 배출했다.
주요 문화재 및 시설
사주문(정문): 입구에 경렴정(景濂亭)이라는 정자가 있고, 죽계 건너편 물가에는 취한대가 위치해있다. 강학당 : 정면 4칸에 측면 3칸으로 장대석 바른층쌓기의 높은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평면구성은 마루방 3칸과 온돌방 1칸으로 사면에 폭이 좁은 쪽마루를 돌렸다.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 기둥 위에 주두를 놓고 쇠혀를 하나 내어 이들을 서로 결구한 굴도리 초익공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두위에 놓인 대들보의 보뺄목은 일부에선 사면으로 끊겼으나 방을 둔 곳에서는 초각하여 둥글게 처리했다. 상부가구는 5량가이고 앞뒷면에 놓인 평주들의 간살은 통칸으로, 20여 척 이상이 되나 대들보를 전후 평주 위에 놓고 잘 치목한 대량 위에 주두와 초각 보아지를 끼운 동자주를 두어 종량과 중도리를 받쳤다. 종도리는 소로를 끼운 파련대공 위에 올려져 있다. 「백운동(白雲洞)」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동·서재 : 서원의 기숙사 구실을 하는 곳이다. 동·서재가 한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 6칸, 측면 1칸 반의 납도리 소로수장집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2칸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 2칸을 두고, 온돌방 앞에는 퇴를 깔아 헌함을 세웠다.
연관된 TV 드라마
《동이》는 2010년 3월 22일부터 2010년 10월 12일까지 방송이 된 문화방송 월화드라마다. 궁인에서 빈으로까지 올라 아들 영조를 성군으로 이끈 숙빈 최씨의 일대기를 다룬다. 한편 여주인공 캐스팅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송혜교, 하지원, 김희선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1] 이런저런 사정으로 고사하자 한효주가 간신히 낙점됐다. 왕조시대 신분계급 중에서 최하층인 천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오로지 재물의 교환 가치로만 평가를 받던 그들이 살던 생활의 질곡과 희망 그리고 자의식을 시청자들에게 소개한다. 18세기 중반, 조선 신분사회의 심각한 모순과 급격한 변화를 천민 출신의 주인공을 통하여 생생하게 묘사한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