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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지정된 전통 민속마을 : 안동 하회마을 안동 하회마을의 역사와 특징 풍산 류씨 집안의 발상지이며 그들의 자손들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서애 류성룡과 겸암 류운룡이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강거의 제일은 평양이요, 계승의 제일은 하회'라고 극찬하였다. 특히 류성룡은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학설에 따라 이기론(理氣論)을 펼치고 양명학을 비판했으며 이황의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좇아 기(氣)는 이(理)가 아니면 생(生)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여 기보다 앞서 있는 실체로서의 이를 규정했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 2024. 2. 19.
울산의 경치 좋은 아름다운 강 : 태화강 태화강의 역사와 변천 기원전 3000년 무렵의 홀로세 초기까지만 해도 울산의 도심권 저지대는 모두 바다였다. 이 무렵에는 지금의 울산광역시 남구 및 중구 일대에 거대한 만이 형성돼 있었는데, 이를 고(古)울산만이라고 한다. 현재의 태화강 상류 방향으로 가면서 점차 만이 좁아지면서 최종적으로 지금의 구영리 일대에 최초의 태화강 하구가 형성되었다. 이 굴화~구영리 일대의 좁은 만을 고(古)굴화만이라고 한다. Flood Maps에서 해수면을 6~7m 정도 올린 상태의 울산 지형이 당시의 지형과 매우 흡사하므로 참조하면 좋다. 지금도 태화강은 비가 많이 오면 엄청나게 물이 불어나고 대량의 토사를 운반하는데, 이것이 수천 년 동안 이어지다 보니 역사 시대에 들어서 굴화만이 점차 퇴적으로 사라졌고, 전반적인 고울산.. 2024. 2. 18.
영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자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최초의 사액서원 1542년,[1] 풍기군수였던 신재 주세붕이 우리나라에 고려말의 유학자 안향의 연고지에 사묘를 세워 안향의 위패를 봉안했다.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후일 조선건국의 주도계층인 신진사대부의 형성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 다음 해에는 유생들을 교육시킬 학사를 건립하여 소수서원의 전신이되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창건되었다. 서원의 명칭인 백운동은 주자가 세운 여산의 백록동서원을 본따 지은것으로 알려져있다. 백운동서원은 부지는 원래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사찰인 숙수사(宿水寺)가 자리한 곳이었다. 숙수사의 법통이 어떻게 끊겼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안향이 이 숙수사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안향의 아들과 손자까지 이 숙수사에서 .. 2024. 2. 16.
경주에 가면 꼭 가봐야할 명소 : 대릉원 경주 대릉원의 역사와 개요 경주 분지 한가운데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신라 당시에도 수도 서라벌 시가지 가운데에 있는 국가 묘역공원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추정한다. 대릉원과 바로 옆에 붙은 쪽샘지구에서 발굴 조사해 보니, 신라 당시의 도시 기반 시설과 건물 터가 대릉원 주변 지역에는 빼곡하게 차 있음에도 대릉원 일대에선 거의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시가지로 가득찬 대도시 가운데지만 대릉원부터는 건물을 못 짓게 개발제한구역으로 관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멸망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관리가 부족해지자 조선시대~일제강점기에는 대릉원 무덤과 무덤 사이까지 사람들의 주거지가 생겼지만 현대에 들어 정비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대릉원의 무덤들은 문자로 표기된 기록이나 비석류가 일절 출토되지 않았.. 2024. 2. 15.
남쪽의 아름다운 섬 외도를 살펴보자구요 외도의 역사부터 살펴봅시다 외도는 과거에 바위만 무성한 황폐한 무인도에 가까운 섬이었다. 육지에서도 멀리 떨어진 외딴 섬이었기 때문에, 그곳에는 전기시설도 통신시설도 없었다. 광복 직후에는 8가구만이 살고 있었는데, 배로만 갈 수 있는 접근성이 떨어진 곳인 데다가 광복 후 초기에는 변변한 정박시설조차 없었다. 이곳의 주민들은 경사진 밭에 고구마를 심거나 돌미역을 채취하거나 고기잡이를 하며 생활을 하였다. 기상이 악화되는 날이면, 10여일간 교통이 두절되어 곤란을 당하기 일쑤였다. 1969년 7월 이창호는 이 근처로 낚시를 왔다가 태풍을 만나 우연히 하룻밤 민박을 한 것이 인연이 되어 1973년까지 3년에 걸쳐 섬 전체를 사들이게 된다. 이 씨의 고향은 평안남도 순천이었는데, 부부는 이 섬의 자연에 매료되.. 2024. 2. 14.
대통령 휴양지였던 청남대 청남대의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전두환 정부 시절인 1983년 6월 착공되어 12월에 완공했다. 개장 당시 이름은 '영춘재' 였지만, 1986년에 현 명칭인 청남대로 변경되었다. 이후 국민의 정부 시절까지 청남대는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저도에 있는 청해대와 함께 대한민국 대통령의 전용 별장 역할을 하였다. 특히 정국 구상 등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대통령이 청남대에서 휴가를 마친 뒤 발표하는 국정 현안은 '청남대 구상' 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김영삼은 금융실명제와 역사바로세우기 등 주요 정책들의 구상을 전부 청남대에서 논의하였고, 김대중 역시 2000년 청남대 휴가에서 6.15 공동 선언 및 4대 입법 개혁에 대한 구상을 했으며, 임기 막바지인 2002년 연말에는 청남대에서 박지원 비서실장을.. 2024. 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