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의 일반적인 사항은 이렇습니다
서울 독립문(서울 獨立門, 영어: Dongnimmun Arch, Seoul)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에 영은문 주초 부근에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주도로 세워진 뒤, 1963년에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현재의 위치는 1979년 성산대로 공사 과정에서 영은문 주초와 함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독립근린공원 내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독립문(獨立門) 또는 서울 독립문은 대한민국의 사적 제32호로, 조선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1896년부터 1898년에 걸쳐 완공된 기념문이다. 양식은 유럽식 개선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문의 기능을 수행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기념비(monument)로서 만든 것이다. 크기는 높이 14.28m, 너비 11.48m이다. 청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로 독립협회가 건축한 건축물이다. 원래는 영은문이 있던 자리였는데 청나라가 유럽 열강에 식민지화 되자 독립협회가 영은문을 강제로 헐어버렸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독립군가에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라는 가사가 나오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제국으로부터의 독립에 대한 염원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독립문의 디자인은 서재필이 담당했다. 현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립 당시의 위치는 아니다. 금화터널, 사직터널을 잇는 현저고가차도 공사를 위해 원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70미터 정도 들어 옮겼다. 원래의 위치는 현재의 독립문역 사거리 중심부다.
독립문의 설립배경을 좀 더 살펴볼께요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고, 청은 이 전쟁에서 패전하고 말았다. 이듬해에 청일 간의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여기서 조선의 자주독립을 훼손하는 조공관계의 폐지를 선언하면서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했다. 이제 조선 내부에서도 동네북이 되어버린 청나라와의 관계를 재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고, 조선 국왕이 직접 나가 칙사를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조선 조정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지면서 갑오개혁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친일 인사들은 모두 복권되고, 박영효는 같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한때의 동지인 서재필에게 조선으로 건너올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 서재필이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와서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2월에 아관파천이 벌어져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입지를 잃거나 숙청되었는데, 서재필은 미국인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에 입지를 보존할 수 있었고, 이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 지원금 4400원이 들어간 만큼 친정부적 어용신문이었고, 이 와중에 생성된 단체가 독립문 건립 추진위원회이다. 그리고 이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가 바로 이후의 독립협회의 모체가 된다.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쌓은게 아니라, 독립문을 쌓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다. 단적으로 이 독립문 추진 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 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하던 정동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다. 그리고 1896년 5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 관계는 슬슬 틀어지기 시작했다.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다. 그래서 1896년 7월에 독립문 건립 추진 위원회를 기반으로 해서 독립협회를 창설했고 회장에는 안경수, 위원장으로는 이완용을 정했다. 서재필은 고문이었고, 동농 김가진, 월남 이상재 등의 고위 관료와 명사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는 독립협회건 《독립신문》이건 죄다 친정부 성향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서재필은 1896년 초부터 《독립신문》에 독립문 건설의 당위성을 계속 주장했다. 이를 위해 서재필은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토대로 기본 스케치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 공사관 출신 스위스인이 설계를 했으며, 시공은 한국인 건축가 심의석이 담당하였다. 건설 비용은 독립 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다. 이후 조선인 건축사 심의석이 건축을 맡아 1896년 11월 21일 영은문 부지에서 공사에 돌입했고, 이후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해 동년 10월 대한제국을 선포했고,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는 충실하게 이를 지지했다. 그 후 1897년 11월에 완공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문이 되었다. 한글과 한문으로 적힌 현판 아래에는 대한 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이화문이 새겨졌다. 태극기 또한 새겨져 있는데, 이 태극기가 소위 말하는 '독립문 태극기'이다. 하지만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서재필이나 박영효와의 문제로 대한제국과 틀어지게 되었다. 그 후 대한제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은 독립문 건설의 배경을 눈여겨보고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인들을 청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시켜 주었다.'라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근거로 이용하려고 강점기 내내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았다. 1979년,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성산로[8]를 건설하는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와 금화터널 예정지가 독립문 부지와 간섭되자, 이를 이격시켜 고가도로를 놓기 위해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다. 1979년에 성산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했다.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은 "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자는 마음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이라는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독립문 고가 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독립문 고가 차도가 일산, 운정, 행신, 가좌동, 연대앞을 비롯한 수도권 서북부 지역과 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 도로라서 반발이 엄청날 게 뻔해서 복원이 어렵다. 일산, 운정을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 버스가 이 독립문 고가 차도를 지나갈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다. 그런데 이전하기 전에는 순수한 석조물로 알고 있었으나, 뜯어 보니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것이었다. 돌 현판 글자는 당시에 지금과 달리 한글도 우에서 좌로 썼기에 '문립독'이라고 되어 있다.
역사적인 논란사항은 이렇습니다
독립문의 현판 글씨를 이완용이 쓴 것이라는 주장과, 김가진의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이완용이 쓴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이완용이 초기 독립협회의 활동이 밀접하게 관여하였으며,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는 풍문이 실려있다는 것이다. 김가진이 쓴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김가진 역시 독립협회의 활동에 밀접하게 관여하였고, 김가진의 글씨체가 독립문 현판의 서체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현재 김가진의 후손들은 후자의 논거를 근거로 독립문 현판의 글씨를 김가진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나, 관련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아 그 진위는 불명으로 남아있다. 서재필은 그의 자서전에서 독립문을 설계한 사람이 독일공사관에 근무한 스위스인 기사라고만 설명하였는데, 2009년에 들어 일부 러시아 사학자들은 독립문의 설계자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이라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의 근거는 사바틴이 스위스 등 여러 국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국제인이라는 것뿐이다. 문화재청 학예연구사에 따르면, 2020년대까지도 사바틴은 명성황후의 시해를 목격한 외국인으로서의 행적이 널리 알려져 있을 뿐이고, 경복궁 관문각과 러시아 공사관에 대해서만 관여가 확실하게 확인될 뿐이다. 그 밖에 사바틴이 독립문 설계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확인된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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