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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소개하고 주요 건축물을 살펴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1. 12.

경복궁 단풍

 

경복궁을 소개해 볼께요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왕조 제일의 법궁(法宮, 임금이 사는 궁궐)으로 태조 4년(1395)에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처음으로 세운 궁궐이다. 궁궐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경회루 남측의 궐내각사 권역에 집현전을 짓고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또한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궐의 서북쪽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륜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벌어지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궁궐의 대부분을 훼손함에 따라 점차 궁궐의 제 모습을 잃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 안에 남아있던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제수각·함화당·집경당·향원정·집옥재·협길당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전해 오던 도성(都城)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궐의 왼쪽(동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서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제도인데, 이러한 형식은 경복궁이 조선의 법궁으로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법궁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경복(景福)'은 시경에 나오는 말로 왕과 그 자손, 온 백성들이 태평성대의 큰 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는 의미다. 풍수지리적으로도 백악산을 뒤로 하고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길지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이후 법궁의 역할을 창덕궁에 넘겨주었다가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후 일제강점기에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와 1926년 조선총독부 건설로 많은 전각들이 철거 혹은 훼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박물관과 잔디밭을 비롯한 정원이 들어섰다. 이러한 모습은 1945년 해방 후에도 이어졌으며 6·25 전쟁을 거치면서 일부 전각이 추가로 소실되었다. 1968년 광화문 복원을 시작으로 경복궁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한 각계의 관심과 노력이 증대되어,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 계획이 시작되었다. 1995년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 2001년 흥례문 권역 복원, 2010년 광화문 목조 복원, 2023년 광화문 월대 복원을 비롯하여 각 권역별 주요 전각들을 오는 2045년까지 복원시킬 계획이다.

 

경복궁의 주요 건축물들을 살펴볼께요

경복궁은 동서남북으로 4개의 대문들을 두고 중앙에 근정전, 그리고 동쪽으로 동궁과 자전, 서쪽으로 궐내각사와 경회루를 각각 배치하는 형태로 수십 채의 전각들이 건축되었다. 광화문(光化門) :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원래의 이름은 남문(南門)이었으나 , 세종 때에 와서 광화문으로 명칭이 바뀐다.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1395년에 만들어졌으며, 2층 누각인 광화문 앞의 양쪽에는 한 쌍의 해태 조각상이 자리잡고 있으나, 광화문 복원 공사를 하면서 잠시 이동하였다. 광화문에는 총 3개의 문들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다니는 문이고, 나머지 좌우의 문은 신하들이 다니던 문이었다. 광화문의 천장에는 주작과 용과 거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2010년,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2021년부터 월대 복원을 발굴 공사가 진행중이다. 건춘문(建春門) : 건춘문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건춘문이라 이름하였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던 문이었다. 건춘문의 앞에는 커다란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자리잡고 있으며, 건춘문의 천장에는 청룡이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가 거처하던 춘궁(春宮)이 있었으며, 문 밖에는 왕실의 종친들을 교육하는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던 것을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영추문(迎秋門) : 영추문은 경복궁의 서쪽에 있는 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영추문이라 이름하였다. 문 밖에는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영추문의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에 물자를 조달하는 관청이 자리잡고 있었다. 1865년에 준공되었던 원래 영추문은 1926년에 전차 진동으로 인해 석축이 무너지고 얼마 뒤 철거된다. 1975년에 원 위치가 아닌 북쪽으로 50m 이전한 자리에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해 지었다. 신무문(神武門) : 신무문은 경복궁의 북쪽에 있는 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와 신무문이라 이름하였다. 신무문의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그 이름처럼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그 후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경내에 주둔하게 되면서 45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하고 마주하고 있다. 흥례문(興禮門) : 흥례문은 정문인 광화문과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1867년에 중건되었다가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초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다가,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공사를 시작하여 2001년에 완공했다. 근정전(勤政殿) : 근정전은 경복궁에서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었다.[39] 현재 근정전은 국보 제 223호로 지정되어 있는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39] 임진왜란 전에는 주변 회랑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의 근정전은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상ㆍ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로 지어진 다포계 팔작지붕의 중층 건물이다.[39]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그 가운데로 난 어도(御道) 좌우로 문ㆍ무관이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 쌍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조선 물산공진회때 용상이 훼손되었으나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근정전 해체공사 때 복원되었다. 근정전 건물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의 구분없이 전체가 트인 통칸으로 되어 있으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를 마련하였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

 

- 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