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 이해하기
역사: 월지는 신라가 삼국 통일을 이룬 직후인 문무왕 14년(674년)에 황룡사 서남쪽 372m 지점에 조성되었다. 큰 연못 가운데 3개의 섬을 배치하고 북쪽과 동쪽으로는 무산(巫山)을 나타내는 12개 봉우리로 구성된 산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 사상을 상징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섬과 봉우리에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동물을 길렀다는 가장 대표적인 신라의 원지(苑池)이다. 5년 후인 679년에는 별궁인 동궁을 이에 건축한다. 왕궁에 딸린 연못으로 서쪽에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동쪽과 북쪽은 굴곡이 심한 곡면을 이루고 있고, 연못 안에는 3개의 섬이 있다. 별궁인 임해전과 여러 부속건물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곳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던 곳이다. 명칭: 동궁과 월지(慶州 東宮과 月池, 영어: Donggung Palace and Wolji Pond, Gyeongju)는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위치한 경주 월성의 별궁 터이다. 신라가 멸망한 후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와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예전엔 안압지(雁鴨池)로 불렀다가, 유물 발굴 결과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다는 것이 확인되어 2011년에 경주 동궁과 월지라는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동궁과 월지는 안압지라는 명칭으로 알려져 있었다. 신라가 멸망한 후 월지는 관리가 안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들이 날아들자 조선의 묵객들이 안압지(雁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압지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등에 나타나고 있다. 1980년,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 등으로 신라시대에 이 곳이 월지(月池)라고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신라 왕궁인 반월성(半月城)과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며, 임해전의 이름도 본디 월지궁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동궁을 임해전(臨海殿), 즉 바다에 면한 건물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여기에서 안압지는 바다를 상징한다. 2011년 7월 안압지에서 경주 동궁과 월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유적으로서의 가치
월지 : 월지의 바닥에 여러개의 트렌치가 조성되어 있다. 연못의 발굴조사는 연못 호안의 석축유구를 확인하는 것과 출토유물을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었다. 발굴에 앞서 동궁과 월지의 주변은 현황대로 기록되었고, 이 실측도에 따라 먼저 연못 서안西岸으로부터 남북 폭 2.5m의 트렌치 120개소를 설정하였다. 발굴조사는 설정된 트렌치 구간에서 실시되었다. 발굴조사와 함께 연못 전 구역에 동서 및 남북 의 기준점 및 기준선 설정 측량작업도 이루어졌다. 기준점은 남북 및 동서가 각 10m로 구획되어 10m 방안이 되도록 하였다. 방안으로 구획된 각 트렌치 사이에는 1m폭의 둑을 남기고 서안 북쪽으로부터 남쪽을 향하여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렇게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 트렌치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고 연못 호안주변에서 석축이 노출되기 시작하여 알 수 없었던 호안석축의 축조공법과 그 내용이 확인되었다. 건물지 기단 석축은 물에 잠긴 부분과 물 위에 노출된 부분의 축석 기법이 다르다. 물에 잠긴 부분은 모두 괴석塊石으로 면만 골라 쌓았으며, 수면 위에 노출된 부분은 대부분 길고 높은 장대석을 정연하게 맞추어 쌓았다. 그러나 장대석 기단 석축은 거의 파괴되어 밑에 한·두 단만 제 위치에 남아 있다. 건물지 주위 연못 속에는 장대석 외에 주좌가 있는 초석들이 다수 흐트러져 있었고 돌난간 부재도 출토되었다. 연못의 남동 모서리에서는 2단 수조水槽로 구성된 입수구를 확인하였다. 수조 양 쪽에는 넓적한 판석을 깔고, 그 아래는 3단으로 구분하여 물 흐름에 변화를 주었다. 입수구 쪽 계단식으로 쌓아 올리고 연못 바닥에는 큰 판석을 깔았다. 출수구는 중도의 동북모서리에서 확인되었다. 호안 석축 면에 장대석을 기초로 놓고 그 위에 높이 1.8m의 장방형 판석을 세우고, 판석에 상중하 세 개의 구멍을 뚫어 물높이를 조절하였다. 서안 석축 밑에 소도가 보인다. 또한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섬이 확인되었다. 대도는 연못 남쪽에 있으며, 중도는 대도와 대칭 방향인 연못의 서북쪽에서 확인되었다. 소도는 못의 한 가운데에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 위치한다. 대도에서 소도까지의 거리는 102m, 대도에서 중도까지의 거리는 160m이다. 세 섬은 전부 연못 안에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높이 1.7m 내외로 쌓은 석축 위에 흙으로 가산假山을 만들고 그 위에 자연괴석 등을 놓았으며, 석축 아 래에는 큰 냇돌을 등간격으로 놓아 호안 석축을 받치고 있는 형태로 축조되었다. 건물지 : 연못 발굴조사 완료 후 연못 주변의 서편 및 남편 건물지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연못 서편 건물지에 대한 조사에서는 서쪽 호안 석축과 접한 5개의 독립된 건물지와 그 서편으로 독립된 건물지 여섯 개를 비롯하여 문지門址와 장랑지長廊址 등 많은 건물지와 배수로 시설이 확인되었다. 각 건물지는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이거나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중심 건물지 좌우로는 익랑으로 이어져 있다. 회랑으로 둘러싸인 건물 배치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으로 그 속에 다시 세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어 조선시대 궁궐 배치와 아주 유사하다. 서쪽의 호안 석축에 돌출되어 노출된 다섯 개의 건물지는 연못 내의 세 개 섬과 굴곡진 호안을 바라볼 수 있어서 연회나 휴식을 위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연못의 남편에서는 크고 작은 13개의 건물지와 9개의 원장垣墻 시설이 확인되었다. 연못 남쪽 호안 석축으로부터 약 30~60m 떨어진 범위에서 확인되었으며, 동서 범위는 120m에 걸쳐 조사되었다. 대부분의 건물지는 독립건물지이거나 상호 관련된 것으로, 대규모의 독립 건물과 장랑長廊 형식의 건물지, 그 부속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외 중복 건물지와 소규모이거나 규모가 불분명한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이 때 동서 200 m, 남북 180 m의 대형 연못과 건물지군이 확인되었으며 '월지月池'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과 '동궁東宮'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다수 출토된다. 또한 679년인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라 적힌 기와 역시 출토되어 그 조성 시기를 알 수 있었다. 이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서편 건물지 중 A건물지에 대한 보완조사가 2018년에 이루어졌는데, 정면 7칸에 측면 4칸짜리 건물로, 중심부에 적심이 발견되지 않아 정전의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장경호가 발굴되어 그 연대가 7세기 중후엽으로 동궁의 축조시기와 일치함이 확인되었다.
복원사업과 논란사항
1976년까지의 복원을 통해 알게 된 유적지의 위치와, 획득한 자재들을 토대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동궁과 월지의 복원을 시작한다. 이 때 3개의 전각을 복원했는데 이후 더 복원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현재는 안압지의 세 전각이 우선 복원된 상태인데, 일부에서는 복원을 잘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각의 구조는 그럭저럭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반영하여 복원한 것 같지만, 예를 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속 장식물들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라시대의 궁궐 건축물은 금속 장식물로 사치를 부리는 것을 경계했던 조선시대와는 달리 서까래나 난간 끝에 일일이 금동으로 된 장식 마개 등을 달았고, 덕분에 햇빛이 비치는 날은 건물이 금빛으로 번쩍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버젓이 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중임에도 불구하고 복원된 건물에는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기와의 경우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기와를 활용한 것은 좋지만 마무리가 좀 어설픈 편이다. 단청의 경우에도 논란이 되는데, 일반적으로 고려 말~조선시대부터 유행한 상록하단 단청을 입혀놨기 때문입니다. 다만 발굴된 단청 항아리에 녹색 안료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상록하단의 경향이 삼국시대에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고 신라시대에 어떤 단청을 칠했는지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어서 이 부분은 결론이 안 나는 상황이다. 경주시는 2010년부터 630억원 정도를 들여 신라왕경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동궁과 월지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유네스코 역시 상기한 바와 마찬가지로 충분한 고증이 없는 현 상태에서 무리한 복원을 추지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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