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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를 소개하며 소실과 복원과정을 살펴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2. 7.

낙산사 해수관음상

낙산사를 소개할께요

낙산사 (洛山寺)는 대한민국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이다. 강원특별자치도 영동 지방의 빼어난 절경을 뜻하는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이다. 671년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중건, 복원과 화재를 반복하였다. 2005년 산불의 피해를 입어 여러 문화재가 훼손되기도 하였다. 사내에 칠층석탑(보물 499호),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1362호),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및 사라장엄구 일괄(보물 1723호) 등의 문화재가 있다. 2005년 화재로 보물 479호였던 낙산사 동종이 융해, 소실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화재 이후 낙산사는 몇 년에 걸쳐 복원 공사를 벌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양양군의 대표적 관광 명소 이기도 하며, 지역 사회의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기도 하다.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이다. 관세음보살이 머무른다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즉 낙산(오봉산)에 있는 사찰로, 신라 문무왕 11년(671년)에 의상(義湘)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삼국유사에 수록된 전설에 따르면, 의상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자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 속에서 희미하게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며 "내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대나무 2그루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그곳이 바로 원통보전(圓通寶殿) 터라고 한다. 이를 계기로 오봉산을 관세음보살이 있는 낙산(보타락가산)이라 여겨 '낙산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의상대(義湘臺), 홍련암(紅蓮庵) 등이 있으며 일대가 사적 제495호로 지정되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으로도 손꼽히고 관동팔경[3]의 하나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조선 세조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담장 및 홍예문 등이 있다.

 

소실과 복원의 역사

2005년 대화재 이전의 역사는 아래와 같다. 신라 헌안왕 2년(858년)에 범일(梵日)대사가 중창하였으나 고려 고종 18년(1231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조선 억불 군주였던 태종이 재해를 막기 위해 행차해서 법회를 열었으며, 조선 세조 13년(1467년)에 왕명으로 크게 중창하였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화재를 겪었다. 다시 인조 2년(1624년), 9년(1631년)과 21년(1643년) 재차 중건했다. 정조 원년(1777년)에 화재를 당했고 이듬해에 다시 중건하였다. 6.25 전쟁으로 소실되어 결국 1953년에 다시 지었다. 2005년 4월 4일 일어난 큰 산불이 5일 오전 낙산사로 번져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당시 산불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이전부터 낙산사 주변에서 물을 뿌리며 확산을 막던 소방헬기들도 다른 곳의 불을 끄느라 도저히 낙산사로 올 수 없었고 그나마 온 소방차가 오히려 불에 탈 정도였다. 낙산사의 승려와 신도들이 소화기로 불을 꺼보려 했지만 고작 소화기 따위로 이 큰 산불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화재로 보물 제479호로 지정되었던 낙산사 동종이 녹아서 소실되면서 결국 같은 해 7월 7일 지정해제되었다. 산불에 어떻게 금속 종이 녹아내리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무가 탈 때 내는 에너지는 생각보다 크다. 산불 같은 대화재의 겉불꽃(제일 뜨거운 부분)은 천수백°C로 녹는점이 천°C 근처인 구리나 청동은 충분히 녹일 수 있다. 게다가 차라리 종이 넘어져서 땅바닥으로 굴러갔다면 손상은 입어도 녹지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종루가 불타서 종을 그대로 덮어버려서 화덕에 들어간 꼴이 되어 이렇게 녹아버린 것이다. 이후 동종은 2006년에 복원되어 다시금 낙산사에 걸렸다. 화재 당시 녹아내렸던 동종은 낙산사 안 의상대사 기념관에 옮겨져 있다. 전소 이후 복원불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만 불타기 전의 낙산사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뒤 성급하게 지어져 꽤나 난잡한 상태였기에 바로 복원하지는 않았고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낙산사 유구를 발견했다. 그 중 낙산사가 가장 번성하였던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결정이 났고, 김홍도의 낙산사도를 참고하여 복원불사에 착수하여 2007년 4월 5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과정에서 형태가 바뀐 전각도 여럿 있으며, 저번처럼 타버리지 않게 불에 강한 나무를 심거나 바람길을 뚫는 등 화재에 보다 대비했다. 또한 화재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화재 이전보다 고압수방수 살포장비 등 비상대응 장비를 여기저기에 설치하였다. 화재 이전의 낙산사는 거의 숲이라고 봐도 될 정도로 나무가 많았었는데, 복원된 뒤에는 약간 휑하게 보일 정도로 경내에 나무가 없어졌다. 그래도 산불 이후 15년이 지난 2020년대에는 어느 정도 나무들이 커져 그런대로 숲이 울창해지긴 했다. 낙산사 동종 역시 예전의 형태대로 복원되었지만 문화재로 등재되지는 못했다. 앞서 서술했듯이 문화재청이 문화재 가치를 잃었다고 하여 보물에서 지정해제되었기 때문이다. 절 초입에는 낙산사 산불재난 안전 체험장을 조성하여 불타버린 범종루를 형상화한 모형을 가져다 놓았다.

 

낙산사 랜드마크인 해수관음상 살짝 알아볼께요

절 끝자락에 위치한 높이 15 m, 둘레 3 m의 거대한 관음불상으로 홍련암, 의상대와 더불어 낙산사의 랜드마크. 이 해수관음상의 존재로 낙산사는 강화 석모도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함께 3대 해수 관음기도 도량으로 꼽힌다. 1971년부터 조각을 해 1977년에 완성했으며 그 당시 동양 최대의 불상이었다. 불상의 정면 조금 아래에는 관음전이 있는데 내부에는 따로 불상이 없고, 대신 불상이 있음직한 자리에 통창이 나 있어 그곳으로 해수관음이 보인다. 즉 외부의 해수관음을 향해 실내에서 기도를 할 수 있는 건물이다. 불상 주변에는 시야를 가리는 별다른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설악산(대청봉, 울산바위), 대포항, 낙산해변 등을 조망할 수 있다. 근처에 종이 있는 종각이 있는데 누구든지 한 번씩 종을 쳐볼 수 있다. 앞에 불전함이 있는데, 액수는 자율적이다. 해수관음상에서 홍련암 방향으로 내려가다보면 보물 제1723호에 지정된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이 있다. 화재 당시 불길이 해수관음상을 지나 사리탑을 거쳐 홍련암 근처까지 갔기에 사리탑도 복원 수리를 해야 했는데 사리탑 내부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됐다. 사리장엄구 안에는 여러 유물들과 함께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과가 있었는데 발원문에 따르면 이 사리탑의 조성 이유는 다음과 같다. 1692년(숙종 18년) 홍련암에 있는 불상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상서로운 기운이 나타나더니 닫집[9]에서 진신사리 1과가 나와 이를 사리탑에 모셨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홍련암 앞에 있는 사리탑비의 내용과 일치했다. 낙산사 사리탑과 사리탑비는 그 자체로는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사리탑, 사리탑비, 사리장엄구가 일치된 내용과 관계로서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흔치 않다는 점에서 2011년 11월 보물로 일괄 지정됐다.

 

- 나무위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