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면요
충청남도 부여군에 위치한 절벽이다. 그 유명한 의자왕의 삼천궁녀 전설로 유명하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0호로 지정됐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 백제 왕실의 궁녀들이 이 곳에서 강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에 궁녀들을 꽃에 비유하여, 꽃이 떨어진 바위란 뜻의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羅)·당(唐)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될 때, 백제의 3천 궁녀가 이곳에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몸을 던졌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바위이다. 그러나 실제로 백마강(白馬江)을 향해 삼천 궁녀가 뛰어들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 낙화암은 삼천 궁녀가 다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좁다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궁녀들을 추모하기 위해 육각형의 《백화정》 정자를 건립하였다. 아래에는 송시열(1607-1689)의 글씨로 전하는 '낙화암'(落花岩)이라고 조각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자살한 궁녀에 대한 내용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은 일연의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조인데, 다음과 같다.
[百濟古記云『扶餘城北角有大岩, 下臨江水, 相傳云, 義慈王與諸後宮知其未免, 相謂曰“寧自盡, 不死於他人手.”相率至此, 投江而死, 故俗云墮死岩.』 斯乃俚諺之訛也. 但宮人之墮死, 義慈卒於唐, 唐史有明文.] 《백제고기(百濟古記)》에 말하였다.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아래로 강물에 임하였는데 서로 전하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 이끌고 강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하므로 세상에서는 타사암(墮死岩)이라고 부른다." 이는 속설의 와전이다.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겠지만, 의자왕이 당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는 실제 역사와는 다른 전설도 포함되어 있고 당시 궁궐터를 가지고 분석해 본 결과로는 3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 뒤 고려 시대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권2에서 “여러 비빈”(諸姬)이라고 표현한다.[2] '3천'이라는 수효를 대상으로 한 첫 언급은 조선 초의 문신 김흔(金訢, 1448~?)이 '낙화암'이란 시에서 “삼천의 가무 모래에 몸을 맡겨/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도다(三千歌舞委沙塵 / 紅殘玉碎隨水逝)”라고 읊은 것이 최초였다.[3] 이후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野談社, 1941년)에서 '3천 궁녀'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이홍직(李弘稙)이 쓴 《국사대사전》(지문각, 1962년)의 '낙화암' 항목에서 공식적으로 쓰이게 되었다.[2] 결국 근대 이전에 “삼천궁녀”를 기록한 역사서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한 백화정도 살펴볼께요
백화정(百花亭)은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에 속해 있는 낙화암 위에 건립된 정자로 삼천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1929년 세워진 정자이다. 근처에는 고란사가 있다. 부여군에서 소유 밑 관리를 담당하고 있다.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백제 멸망 당시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에 지은 정자이다. ‘백화정’이란 이름은 중국의 시인인 소동파의 시에서 따온 것이다.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 구조는 육각형 평면을 가진 육모지붕으로 꾸몄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난간을 설치하였고, 천장에는 여러 가지 연꽃무늬를 그려 놓았다. 부소산(扶蘇山)은 대한민국의 부여군 부여읍 백마강 기슭에 있는 산이다. 높이 106m이다. 백제 시대의 유적과 조선 후기에 지은 사비루, 백화정 등이 있다. 백화정 아래에는 낙화암이 있다. 강기슭 가까이에 고란초로 유명한 고란사가 있다. 삼충사, 궁녀사가 있다. 근처의 사찰인 고란사가 있다. 고란사 바로 위쪽으로 낙화암이 있다. 절 뒤의 바위틈에는 고란정이 있고, 그 위쪽 바위틈에는 고란초가 자라고 있다. 절 연혁은 백제 말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할 뿐,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이 절은 원래 백제 왕들을 위한 정자였다고 하며, 또 궁중 내불전이었다고도 전한다. 혹은 백제가 멸망할 때 낙화암에서 사라져간 궁녀들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고려 현종 19년(1028년)에 지은 사찰이라고도 한다. 법당 건물은 1797년(조선 정조 21년)에 은산의 숭각사에서 옮겨온 것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정조 21년(1797년)에 중건했다고 한다. 연화문을 새긴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웠는데 기둥 위에는 조각 장식이 화려한 익공식 공포를 짜올렸다. 초석에 새긴 연화문양은 고려시대 기법으로 추정한다. 사찰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낙화암에 얽힌 전설과 더불어 험준하며 기이한 바위, 고란초 등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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