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서산 해미읍성에 얽힌 역사와 주요시설 및 가시는길에 대해 알아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2. 17.

서산 해미읍성

서산의 유서깊은 해미읍성의 주요 역사를 살펴볼께요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은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옛 읍성이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건축된 성이지만 보존 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서산시에서는 해미읍성을 이용한 축제와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다. 매년 10월에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서산해미읍성문화축제)를,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해미읍성 전통문화공연을 개최하고 있다. 조선말기 천주교 박해당시 약 1천여 명 이상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당한 천주교 성지이기도 하다. 지명유래 : 해미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7년 1407년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餘美縣)을 병합하면서 정해현에서 해(海)자를 따고 여미현에서 미(美)자를 가져와 해미(海美)로 부르기 시작하며 유래되었다. 고려 시대에 충청남도 서산 지역은 정해현, 여미현, 부성현, 지곡현이라는 4개 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에 정해현은 현재의 서산시 해미면 지역에 해당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통일전쟁중에 한씨 성을 가진 몽웅역의 관리가 운주 전투에서 승리하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우자 그에게 대광(大匡) 벼슬을 주고 고구현(高丘縣) 땅을 분할하여 정해현을 설치하여 그의 관향으로 삼게 하였다.[6]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으로, 757년(경덕왕 16) 이름을 여읍(餘邑)으로 변경되었다가 고려 초 다시 여미(餘美)라 바뀌었다. 이 두지역이 병합되면서 해미현이라 불리게 된것이다. 1895년(고종 32) 행정 구역 개편 시 해미현이 해미군으로 변경되었다. 군사적 요충지 : 1417년(태종 17년)에 축성을 시작하여 1414년(태종 14)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이설되었다. 1421년(세종 3년)에 축성이 완료되었다. 해미읍성은 원래 왜구의 출몰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건축되었는데, 충청도 병마절도사가 이 성에 주둔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조때에 군사 제도가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되면서도 이 역할은 여전하여 충청도 지역의 주요 군사거점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1651년(효종 2년)에 병마절도사가 청주로 이전하면서 해미현 관아가 옮겨와 해미읍성이 되고, 문무를 겸한 겸영장이 배치되며 호서좌영으로 명칭이 바뀐 이후, 호서 지방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해미읍성이란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 이름은 '해미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문화재 지정과 복원 :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에 군현제가 폐지되고 해미현이 서산군에 통합되면서 읍성은 폐지되었다. 폐지 이후 일제는 관아건물을 면사무소로, 객사를 학교로 사용했으며 청허정을 신사(神社)로 만들었다.[7] 해방 후 1963년 1월 21일 사적 116호로 지정되었다. 1970년대부터 복원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성내 건물을 철거하고 동헌, 객사, 내아 등을 복원하였다. 2000년대부터 정비공사가 시작되었으며 성내 동헌, 객사, 내아 등을 정비하였고, 2004년부터 해미읍성 역사체험축제가 개최되기 시작하였다. 2014년 8월 17일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문하여 해미순교성지 기념관 앞에서 열린 해미 순교자 3위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하였으며[8][9]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 미사를 주례하였다. 해미읍성과 천주교 : 조선후기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때 천주교도라는 모함을 받아 해미읍으로 유배를 왔었으나 정조의 비호로 10일만에 유배가 해제되어 돌아간적이 있다. 1801년대 순조 때 신유박해로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천주교 박해는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병인양요, 1868년 남영군 분묘 도굴사건 이후 더욱 극심해진다. 조선 후기 충청도 서북 지역(내포지방 13개군현)의 군사와 치안을 함께 관장하던 해미진영(海美鎭營)은 이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의 천주교도들을 모두 잡아들여 해미읍성에서 처형하였다. 당시 처형된 천주교인들은 무려 1,000여명 이상 이었다고 전한다. 이순신의 부임 : 이순신은 1576년(선조 9년) 무과 급제하고 권관과 훈련원 봉사를 거쳐 세번째 관직으로 1579년(선조 12년)에 충청병마절도사의 군관으로 부임하여 해미읍성에서 10개월 간 근무하였다. 당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공은 구차하게 낮고 고달픈 자리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꺾고 남을 따른 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상관인 주장에게 부정한 사실이 있으면 극진히 말하며, 이를 바로 잡았고, 청렴한 자세로 자신의 몸을 단속하면서 털끝만큼도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는 법이 없었다고 전한다.

읍성의 주요 시설과 구조도 살펴볼께요

관아문은 해미읍성의 호서좌영 관아 정문으로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형식의 건물로 아래층 3칸에 달아 그 문으로 통행하고 상층은 누각을 만든 전형적인 관아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남쪽 정가운데 있다하여 일명 진남문으로 불린다. 옥사는 1935년에 간행된 ⟪해미순교자약사⟫를 토대로 복원했으며 1790년부터 100여년간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 곳에서 투옥하였다. 객사는 관찰사 등의 귀빈이 숙박하던 곳이고, 동헌은 지방 관아로 해미읍을 관할하던 관아이다. 책실은 책과 문서를 보관하며 현감의 자제가 거처하던 곳이다. 청허정은 읍성 내 정자로 휴게실의 용도로 쓰였다. 민속가옥은 옥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부농, 서리(말단관리), 상인의 집을 재현하였다. 회화나무는 일명 호야나무라고 불리며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72호로 수령300년 이상 추정되며,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에 매달아 고문했다고 전해진다. 총 길이는 1,800m이며, 성벽 높이는 5m이다. 성벽 밖에 2m 깊이의 해자를 팠다. 북한산성, 남한산성, 삼년산성 등이 산에 쌓은 산성이라면, 진주성, 공산성, 사비성은 강을 낀 산에 건설되었는데 해미읍성은 평지에 타원형으로 지은 것이 특징으로 대략 달걀 모양과 비슷하다.

찾아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문화재 바로 옆에 서해안고속도로가 지나가며, 바로 근처에 시내·시외버스로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자가용, 대중교통 둘 다 접근성이 매우 우수하다. 해미읍성을 방문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자가용 : 수도권, 전라도, 강원도 방면: 서해안고속도로 해미IC에서 진출, 45번 국도(한티로)의 서산, 해미 방향으로 진출, 잠양삼거리에서 해미 방면으로 직진, 회전교차로에서 12시 방향으로 진행하면 된다. 주차는 진남문 동편인 해미읍성 주차장이 있으며 주차난이 있는 게 흠이었지만, 2020~2021년에 확장 공사를 통해 다소 해결이 되었다. 서산 시내 방면: 29번 국도(중앙로)에서 직진해 옥거리교차로에서 해미 방면으로 좌회전을 한 후, 남문2로를 주행해 직진하면 된다. 대전, 경상도 방면: 서산영덕고속도로 예산수덕사IC에서 진출, 21번 국도(충서로)을 짧게 타다가 면허시험장사거리에서 충남도청, 신암 방면으로 좌회전해 오신로를 주행해 임성교차로에서 서산, 해미, 삽교 방면의 45번 국도(윤봉길로-한티로)로 좌회전 해 직진한다. 시외버스 : 해미시외버스정류장에서 승하차하면 된다. 승차권 발행은 해당 승하차지점 바로 맞은편인 차부마트에서 발권을 대행한다. 천안 착발의 완행버스(홍성, 예산 경유)는 차내에서 교통카드 사용이 가능한 경우가 있었으나 어느 시점부터인지 교통카드 이용이 불가해지면서 승차권 발권을 해야 한다. 시내·농어촌버스 : 서산공용버스터미널에서 500번대 시내버스(주로 510, 950(좌석)번)를 타고 해미중학교 정류장이나 해미시외버스정류소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횡단보도를 건너기 귀찮을 때, 해미중학교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단, 종착지가 해미이고 400번대인 노선은 음암, 운산을 경유해 해운로(647번 지방도)를 이용해 너무 돌아가므로, 500번대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한다. 반대로 고북에서 시내버스를 승차하거나 홍성군 농어촌버스(263), 예산군 농어촌버스(500, 501, 510, 511)를 이용한 경우, 해미시내버스승강장에서 하차 후 북쪽으로 500~700m를 걸어가야 한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