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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마곡사의 역사와 주요 문화재에 대해 알려드릴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2. 12.

마곡사의 가을단풍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마곡사의 특징을 알아봅시다

마곡사(麻谷寺)는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이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마곡사 주변의 물과 산의 형태가 태극형이라고 해서 <택리지>나 <정감록> 등 여러 감여서에서는 이곳을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꼽았다. 그래서인지 마곡사에는 시대를 초월한 여러 문화재가 있다. 그 가운데서도 마곡사에서는 특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전각의 현판들을 찬찬히 음미해서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볼 것이 신품사현의 하나로 꼽히는 김생의 글씨로 전해지는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다. 큰 글씨임에도 꽉 차 보이고 활달한 기운이 느껴진다. 두 번째 현판은 영산전이다. 세조어필이라 현판 한쪽에 쓰여 있어 재위 중 온양이나 속리산으로 거둥할 때 마곡사에 들러 쓴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표암 강세황의 대광보전 현판이다. 강세황은 시서화 모두에 능한 예원의 총수로 신위와 김홍도의 스승이었다. 이외에도 심검당은 정조 때 청백리였던 조윤형의 글씨이고, 요사에 붙은 마곡사 현판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 김규진이 그림을 곁들여 쓴 글씨다.

마곡사의 역사도 살펴볼께요

삼국시대인 640년(백제 무왕 41년/신라 선덕여왕 9년)에 자장(慈藏)율사가 창건하였다. 이후 후삼국시대쯤에는 폐사가 되어 도적의 소굴이 되었다가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제자 수우(守愚)와 함께 왕명을 받고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도 세조가 이 절에 들려 ‘영산전’이라고 사액[3]을 한 일이 있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 대사찰이었는데,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이 있을 뿐이다. 이 밖에 절의 보물로는 5층 석탑(보물 제799호), 범종, 괘불 1폭, 목패, 청동 향로 등이 있다. 대웅보전에는 싸리나무 기둥 4개가 있는데,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마곡사 싸리나무 기둥을 몇 번이나 돌았느냐?" 하고 물어봐서 많이 돌았으면 극락에 쉽게 가고 한 번도 안 돌았으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여 온 사람들이 모두 기둥을 돌기 때문에 반들반들 윤이 난다.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 한때 머문 적도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등이다. 640년(백제 무왕 41년, 신라 선덕여왕 9년)에 중국에서 돌아온 자장율사가 월정사와 통도사를 창건할 때 선덕여왕에게 토지 200결을 받아 전탑을 세우고 이곳 마곡사도 함께 창건했다고 전한다. 고려 명종 때(1172년) 보조국사 지눌이 중수하고 범일이 재건하였다.그뒤 보철화상이 주석할 때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이 삼대처럼 빽빽하게 많아서 마곡사라는 절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나말여초의 혼란기에 절이 폐사되고 이곳도 200년가량 도둑의 소굴이 되었는데, 고려 명종 2년(1172년)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도둑떼를 몰아낸 후 제자 수우스님과 함께 대규모 불사를 벌여 중창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세조가 이 절에 거둥해서 영산전 현판을 친필로 남기기도 하고 자신이 타고 온 가마를 두고 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1651년(효종 2년)에 대웅전, 영산전, 대적광전 등을 중건했다. 근대에 들어서 구한말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일본군 장교를 죽이고 인천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탈옥한 뒤에 이곳으로 피신해서 원종이라는 법명으로 출가 생활을 했다. 지금 대광보전 앞 향나무는 당시 김구 선생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소장문화재와 마곡사에 얽힌 에피소드는 이렇습니다

창건 당시에는 30여 칸의 대사찰이었으나, 현재는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사천왕문, 해탈문 등이 남아 있다. 마곡사는 충남에서 훌륭한 절집들을 한꺼번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대한민국 사찰의 28본산 가운데 하나이며 충남의 모든 사찰을 관할하는 큰 절이다. 예로부터 춘마곡이라 하여 주위의 봄 경관이 빼어나며 계곡이 깊어서 《택리지》, 《정감록》 등의 지리지나 비기에서도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의 하나로 이 일대를 꼽고 있다. 오늘날 마곡사에는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 영산정(보물 제800호) · 대웅보전(보물 제799호) · 대광보전(보물 제802호) · 해탈문 · 천왕문 · 명부전 · 응진전 · 심검당 · 국사당 · 매화당 · 흥성루 · 수선사 · 대향각 · 영각 · 고방 등 건물과 탱화 · 전적 · 판본들이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젊은 시절 한동안 머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치하포 사건으로 수감 도중 인천에서 탈옥해 전국을 돌며 도피 생활을 하던 중 이곳에서 하은당이라는 승려를 은사 삼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승려로 출가하였다. 그러나 수사망도 좁혀지고 승려 생활도 하은당에게 갈굼만 당하는 등 영 좋지 못하자 금강산으로 가서 더 큰 가르침을 받겠다는 핑계로 6개월만에 절을 떠났다. 이후 백범은 부모의 설득을 이기지 못하고 환속하였고, 농촌 계몽운동을 거쳐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백범은 오랜 시간이 지난 1946년,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마곡사를 다시 찾았고 사찰 경내를 둘러보며 "사찰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기상으로 나를 환영하여 주나, 48년 전의 승려들은 한 명도 볼 수 없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회고했다. 한편, 광복 이후 방문했을 때 경내에 무궁화와 향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향나무가 현재까지 남아있다.

 

- 나무위키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