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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을 소개하고 인물과 가는 길을 알려드립니다

by 부자손선생 2023. 11. 11.

여주 세종대왕릉 이동로

 

세종대왕릉을 소개해 볼께요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은 대한민국 사적 제195호로, 조선 제4대 세종과 그 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능인 영릉(英陵)과 제17대 효종과 그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1970년 5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5호 영릉·녕릉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여주 영릉(英陵)과 영릉(寧陵)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위치는 경기도 여주시 세종대왕면 왕대리에 있다. 두 개의 왕릉은 약 700m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데, 이를 잇는 오솔길은 짧지만 조붓한 흙길이라 정감이 있고, 숲이 아늑하고 한산해 걷기 좋다. 5월 중순부터 10월 초까지만 산책로로 개방한다. 약간의 오르막과 약간의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라 가볍게 산책할만하고, 이리저리 휘어돌며 구불부굴 길이 이어져 있어 운치가 정겹고 아름답다.

세종이라는 인물(생애)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세종(한국 한자: 世宗, 1397년 5월 15일 (음력 4월 10일)[1] ~ 1450년 3월 30일 (음력 2월 17일))은 조선의 제4대 국왕(재위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으로, 태종과 원경왕후의 아들이다. 형인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종은 과학 기술, 예술, 문화, 국방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내었지만 글을 몰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은 언문으로 불리며 왕실과 민간에서 사용되다가 20세기 주시경이 한글로 발전시켜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식 문자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 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으며 이징옥, 최윤덕, 김종서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와 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고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정치면에서는 황희와 맹사성, 윤회, 김종서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 체제는 일종의 내각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 밖에도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등의 공법(貢法)을 제정하여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세종의 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아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탄생과 봉작: 효령대군 (1396-1486), 태종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의 형으로 조선의 왕자 가운데 가장 장수하였다. 1397년(태조 6년) 5월 15일[1](음력 4월 10일), 한성 준수방(서울 종로구 통인동)에서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당시 정안군이던 아버지 태종과 어머니 민씨(원경왕후)의 여섯번째 자녀이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날 당시 형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와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등 동복 친누나 세 명이 있었다. 아명은 막동(莫同)이고, 이름은 도(裪)이다. 1408년(태종 8년),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으며 같은해에 소헌왕후가 되는 심온의 딸 심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공부를 좋아하였으며, 두 형과 함께 빈객으로 임명된 계성군 이래(李來)와 변계량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정몽주의 문하생인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책을 한시도 손에 놓지 않아 눈병과 과로로 건강을 해치기도 하여, 태종은 책을 모두 감추게 하기도 했다. 1412년(태종 12년) 효령대군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되어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충녕대군은 형제간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특히 친동생인 성녕대군에게는 형제 중 직접 병간호를 할만큼 우애가 각별했으나 홍역을 앓던 성녕대군은 끝내 병을 털어내지 못한 채 사망하였다. 세자 책봉과 즉위 : 1418년(태종 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의 여러 가지 비행에 고심하던 중 신료들의 폐세자 주청에 대한 상소가 연이어 올라오자,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하여 종사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세자를 폐위시키고 광주(廣州)로 추방하였다. 이어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하였다.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은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세자는 양위를 거절하였으나 오랜 기간 반복된 태종의 양위를 받아들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10]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으나 세종의 재위 초기에는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권과 인사권을 직접 행사하였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비롯한 외척세력을 숙청하였다. 이후 세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다. 그러면서도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다. 아울러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하였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또한 4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다.

찾아가는 길은 아래와 같아요

인근에 새로 지어진 수도권 전철 경강선상의 역은 영릉역이 아니라 좀 더 직관적으로 풀어 쓴 이름인 세종대왕릉역으로 이름이 정해졌다. 세종대왕릉과 세종대왕릉역은 같은 행정 구역(세종대왕면)에 있을 뿐, 연계 교통이나 타 관광지 연계 등을 생각하면 여주역으로 이동하는것이 좀 더 낫다. 영릉 권역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는 2016년 9월 기준 하루 3편 정도로 능의 주인인 세종이 호통 칠 수준이었다. 경강선 임시 개통 기간 동안은 1시간에 1대 운행하는 열차에 맞춰 임시 버스가 운행하기도 하였으나, 반응이 별로였는지 정식 개통 이후로는 아직 말이 없다. 여주 시내에서 약 3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경기광주 버스 111번을 이용하면 그나마 매표소 기준 도보로 약 20분 거리에 내려준다. 남한강자전거길이 인근에 있어서 자전거가 있으면 접근이 쉽지만, 자전거는 내부로 반입이 안된다. 2023년 기준 영릉 앞으로 운행하는 시내버스 현황은 다음과 같다. 양방향은 여주역에서 출발하거나 종점에서 여주역 방면으로 갈 때 모두 정차하는 노선이다. 일부 노선은 한쪽 방면으로만 정차하는데, 여주역에서 갈 때 탈 수 있는 것은 종점, 영릉에서 여주역으로 갈 때 탈 수 있는 것은 시내로 표기하였다. 관람구역은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으로 나뉘는데, 각각 매표소와 주차장 등이 따로 있지만, 관람구역 내의 두 영릉 사이에 약 700m 남짓한 숲길이 이어져 약간의 언덕 넘기 운동을 하면 함께 관람할 수 있다. 관람구역 밖에도 두 영릉의 주차장을 연결하는 산책로가 있어서, 왔던 길로 돌아가기가 싫다면 이를 이용할 수도 있다. 세종의 영릉은 별도 전시관 및 세종대의 과학 기구 복제품 등이 전시되어서 천천히 관람하려면 적어도 30~40분 이상 소요된다. 효종의 영릉까지 관람하려면, 이동시간 등을 고려하여 1시간 30분 정도는 잡아야 한다.

 

- 위키백과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