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조계사의 소개와 역사 및 주요시설을 알아볼께요

by 부자손선생 2023. 11. 13.

조계사 연등

조계사를 소개합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수송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의 교구본사이자 총본산(總本山)이다. 봉은사와 함께 서울 시내 시주가 많이 들어오는 대표적인 사찰이기도 하다. 사찰 규모는 소박한 편이나 대한민국 불교 최대 종단의 본사(本寺)답게 경복궁 근정전에 맞먹는다는 거대한 대웅전이 있고, 입구에는 '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 현판이 걸린 거대한 일주문이 정문 역할을 한다. 경내 대중전 옆에는 천연기념물 제9호인 백송(Pinus bungeana)이 자란다. 500년 이상 묵은 노송이지만, 대도시 한복판 조계사에 있는 관계로 생장환경이 열악해 전반적인 상태는 좋지 않다. 조계사(曹溪寺)는 조계종 절로 1395년에 지어졌다. 1910년에 승려들의 모금으로 설립된 각황사가 모태이다. 1938년에는 태고사가 설립되었고, 1954년에 조계사로 개칭되었다. 현재 조계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다.

조계사의 주요 역사를 살펴볼께요

삼각산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조선 태조 이성계 재위 4년(1395)에 창건되었다고 말하나, 실질적 창건은 구한말 순종 융희 4년(1910)에 되었다. 현 조계사는 그 역사가 비교적 짧으나 얽힌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대한제국 시절, 한국불교에는 구심점이 될 종단이 없어 계속 들어오는 일본불교 세력에 밀리기만 하였다. 이런 상황에 개탄하여 만해 한용운 등 민족적 불교인사들이 새 종단을 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이에 1902년, 흥인지문 밖 지금의 창신동 창신초등학교 자리에 원흥사(元興寺)를 창건하고, 1908년에 각 도의 사찰 대표 65인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치한다. 원종의 주 목표 중에는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우는 것도 있었다. 조선왕조 내내 유교 성리학을 숭상하고 불교는 억제하는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멀쩡한 절도 산자락으로 추방당하거나 방화로 사라지는 판에, 한양도성 사대문 안에 절이 생기는 건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1895년까지는 승려는 천민급 신분으로, 도성 출입마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이 때문에 사대문 안에 절을 세운다는 것은 억압받던 한국 불교계에 있어 의미가 컸으며, 또한 시대가 달라졌음을 뜻했다. 원종 종무원의 대표격이었던 이회광(李晦光)은 일본불교의 힘을 빌어 원종을 인정받고자 했다.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5]를 원종 고문으로 추대하고, '연합맹약'이란 것을 맺어 연합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동종 밑에 원종이 들어가는 꼴이었다. 이회광은 인품이 훌륭하다는 글도 전해지는 승려였지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보지 못하고 친일행적을 저질렀다. 조선총독부는 원종의 신청을 기각도 승인도 하지 않고 싸움을 지켜보다가, 1911년에 사찰령 등을 내려 한국불교를 조선총독부가 직접 관할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더 이상 일본불교를 앞세워 조선침략을 꾀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한국불교마저 총독부가 직접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이듬해부터 해인사를 시작으로 30본사를 선정, 사법을 인가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직할체제인 30본말사제를 시행했고 곧 임제종과 원종이란 명칭을 못 쓰게 했으며 임제종은 저항 끝에 강제 해산되었다. 이회광과 원종은 곧 '조선불교선교양종각본산주지회의원'으로 바꾸고 존속하려고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이 쓸모없어진 원종의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원도, 승인도 안 해줬고 결국 1912년에 원종은 사라진다. 원종의 친일적 주지승들은 '삼십본산연합사무소'로 들어가 종명이 '조선불교선교양종'이 된 한국불교 30본사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광복 이후인 1954년에는 대처승과 같은 왜색불교 정화운동의 과정 중 안국동의 선원에 있던 비구승들이 태고사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서로 갈등을 빚어 원래의 태고사란 이름과 비구승들의 조계사라는 이름이 같이 붙게 되었는데, 결국 1954년 이러한 감정은 '비구승 vs 대처승 분규 사건'으로 폭발하였고, 이승만 등이 지원함에 힘입어 비구승들의 승리로 끝났다. 비구승의 주도로 1962년 통합종단으로서 대한불교조계종이 세워지자 태고사 역시 조계사로 개칭되어 지금까지 유지된다. 비록 과정에 문제가 있었지만 전통적인 비구승들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대처승들을 몰아내었음은 불교계가 전통적인 모습으로 부분회귀하는 데 성공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조계종은 내부분규 사태나 지나치게 순수불교를 지양하면서, 정작 전통불교에서 멀어지거나 무리한 불사 등으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사찰에 있는 주요 시설을 보면

대웅전에 불상 3좌를 봉안하여 이를 삼존불이라고 부른다. 좌로부터 각각 아미타여래(아미타불), 석가여래(석가모니불), 약사여래. 이 세 불상은 대웅전 크기 때문인지 법당 내에 모신 불상 중에선 매우 큰 편에 속한다. 실제로 보면 크기에 압도된다. 불단 오른쪽 아래에는 미니사이즈 석가모니불이 있는데 이는 대웅전 중수 당시 영암 도갑사에서 모셔온 불상이다

본래 이 대웅전은 일제강점기 증산 계통의 종교인 보천교의 본당인 십일전이었다. 일제가 보천교를 독립운동 지원 혐의[25]를 빌미로 교단을 해체하면서 보천교의 시설들을 압수해 헐값으로 매각하였고, 이때 진정원의 십일전 목자재들을 불교계에서 매입하여 1937년 11월 26일에 지금의 대웅전을 짓게 되었다. 조계사는 대웅전을 완성한 이듬해에 단청을 칠하고 화엄사 대웅전 편액의 탁본을 떠서 현판을 만들고, 전라남도 영암군 도갑사에서 본존불상을 가져와서 대웅전에 안치하였다. 극락전은 대웅전 옆의 건물 1층에 위치한 작은 법당이며,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곳은 조용히 염불이나 참선하기 좋은 분위기이다. 관음전은 2015년 현재 조계사 앞쪽에 새로이 '관음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건물은 그냥 현대식 사각형 시멘트 건물이다. 법당에는 관음좌상이 안치되었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고 법회도 많이 열려 분위기가 시끌벅적한 대웅전과 달리, 이 곳은 그야말로 고요한 좌선실 분위기 그 자체다. 불교중앙박물관은 다른 사찰의 박물관과는 수준이 달라서 나름대로 소장품의 질이나 전시의 질이 꽤 좋은 편이다. 한국사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눈여겨 볼 만하다. 불교대학은 정식 4년제 단과대학이 아니라, 불교에 대해 심층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신도와 승려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체 교육기관이다. 신도들에게 불교교리 및 문화강좌가 진행되는 곳. 일종의 불교교양대학이다. 

 

- 위키백과 참조 -